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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Aug 22. 2019

엄마가 길들여 놓은 우리의 여름 밥상

rural recipe (August 1st, 2019)


호박은 키우기 쉬울 줄 알았다. 텃밭마다, 집집마다 호박은 가장 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많이 심는 경우도 거의 없다. 5월에 각종 모종들을 심을 때 서너 개만 심으면, 4인 가족이 먹기에 충분하게 얻고도 남는다고들 한다. 물론 호박은 열매가 큰 채소라 퇴비를 충분히 줘야 한다. 퇴비만 충분하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그 열매를 오래 두면 크고 누런 늙은 호박이 되어 겨우내 별미의 재료도 얻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게 호박은 그리 호락호락한 작물이 아니었다. 크고 노란 꽃은 많이 피지만, 꽃이 핀다고 다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꽃은 비슷하게 보여도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암꽃뿐이었고, 열매가 달렸다고 모두 호박으로 크지도 않았다. 구슬만한 열매가 더 크지 못하고 썩어 버리기 일쑤였다.
 
호박이 키우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텃밭의 점령자이기 때문이다. 호박이 하나만 있어도, 한 여름을 지나며 텃밭이 호박 덩굴로 덮여 버렸다. 호박은 엄청난 속도로 덩굴을 온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다른 작물에게까지 손을 뻗치며 괴롭혔다.
 
농사 초보인 내가 호박을 너무 얕본 것이다. 덩굴이 무성하게 웃자라는 여름, 순을 쳐서 열매가 잘 익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손자 줄기에서 열매가 많이 생긴다는데, 어느 줄기가 아들 줄기인지 조차 못 찾고 있으니... 늙은 호박은커녕 애호박을 수확하는 순간이 올지 의문이 생기는 여름철을 보내고 있었다.
 
애써 호박을 키워온 시간이 아까워지려 할 때, 생각이 났다. 어릴 적 엄마가 차려 주던 여름철 밥상이. 그 밥상에는 나박나박 썰어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호박 볶음이 있었다. 얇게 채 썰어 소금에 살짝 절인 뒤 뜨겁게 달궈진 팬에 볶아 비빔밥에 넣어 먹는 호박 볶음도 있었다. 돼지고기를 볶다가 육수를 넣고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푼 뒤 호박을 잔뜩 넣어 자박하게 끓인 호박 찌개도 간혹 올라왔다. 하지만 대체로 밥상을 채우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호박은 열매만 먹지 않는다.
 
텃밭으로 올라가 호박잎을 땄다. 엄마가 차려 주던 여름철 밥상에 주로 올라오던 다른 호박 요리를 먹기 위해서. 줄기와 잎을 뒤덮은 가시 때문에 맨손으로는 덩굴을 잡기조차 어려웠다. 너무 크고 오래된 잎들은 제외하고, 어른 손바닥을 쫙 편 크기의 잎들을 꺾었다. 줄기를 톡 꺾어서 잎맥으로 이어진 흰 외피를 벗겨내는 것은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기억 속 엄마가 하듯 나도 했다.
 
찬물에 잎을 헹군 뒤, 찜기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냄비 바닥에 약간의 물을 넣고 팔팔 끓을 때 찜기를 넣어 잠깐 쪘다. 뜨거운 열기를 식힌 뒤, 갓 지은 흰 쌀밥을 올리고 장을 조금 넣었다. 큰 쌈밥을 한 입에 넣었다. 손이 아플 만큼 까칠했던 호박잎은 한없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밥과 약간의 장, 그리고 호박잎 특유의 향이 입안에 가득 돌았다. 그 맛을 느끼면 느낄수록 어릴 적 여름철이 선명하게 떠 올랐다.


첫날은 쌈장에, 둘째 날은 젓갈에, 셋째 날은 강된장을 만들어 싸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호박잎이 맛있어서인지, 그리운 시절의 기억들이 좋아서인지 모르지만 며칠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네 시장에 갔다가 호박잎이 보이길래 반가워 샀는데 어떻게 해 먹어야 하는지 묻는다. "아니 호박잎이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왜 돈을 주고 사 먹어!! 밭에 호박잎이 지천인데!!" 도시에 살아도 이 여름, 호박잎이 떠오르는 입맛은 버릴 수 없는데 내 입만 챙겼다. 스스로의 무심함에 화가 났으면서, 괜히 동생에게 신경질을 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텃밭에 올라갔다. 연한 잎들 위주로 싸서 택배를 보냈다. "택배비가 더 들겠다. 무슨 호박잎을 보내~"라고 말했지만, 호박잎을 받은 동생은 말했다. "물에 담아 놨더니 생생해져서 어제 꺾은 것 같지도 않더라! 농사 초짜가 키웠는데도 호박잎은 맛있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내가 직접 키운 호박잎을 먹는 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어쩌다 발견하는 호박잎을 반가워하는 동생.
 
우린 따로 떨어져 있어도 호박잎 하나로 같은 밥상을 마주한다. 하긴, 한 때 한 밥상에서 엄마가 길들여 놓은 입맛을 가졌으니 당연하다. 더위로 식욕이 떨어지는 여름철, 엄마는 호박잎쌈을 자주 밥상에 올렸었다. 까칠 거리는 잎 한 장 한 장의 잎맥을 없애 더 연하게 만들고 쪄 내는 번거로운 과정도 모른채, 호박잎쌈은 너무 흔하고 맛도 심심해서 단 한 번도 특별한 음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평범하고 무심한 음식이 여름철 밥상을 지키는 별미이자 비타민이 가득한 식재료였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호박은 가장 뜨겁다는 삼복 기간에도 엄청난 속도로 자란다. 꺾어도 꺾어도 덩굴은 새 손을 뻗으며 자랐다. 마치 세상 어디라도 가겠다는 기세다. 호박의 그 강한 생명력이 담긴 잎을 먹으며 우리가 세상 어디서든 기운차게 살아가길 엄마는 바랬던 걸까? 엄마가 길들여 놓은 입맛 덕분에 나와 동생은 이 여름, 흔하지만 특별한 호박잎 쌈밥을 먹는다. 어릴 적 한 밥상에 앉아 먹던 그리운 기억까지 함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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