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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Oct 02. 2019

가장 귀했던 꽃, 쌀 꽃

rural flower (August 17th, 2019)




"언제쯤 펴요?"
"어머니~ 꽃 폈어요?"
팔월. 나는 올해도 깜빡하고 놓칠 것만 같았다. 대문 밖을 나서면 지천이 논이지만, 못 보고 지나칠 듯했다. 지난해에도 못 봤는데 올해 또 그냥 지나치지 않으란 법이 없었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경우, 그 존재나 변화를 알아채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논에 둘러 쌓여 살면서 그 꽃을 본 적 없다는 것이 민망했다. 반드시 보고야 말리라 결심한 뒤, 늘 돌보는 사람, 분명히 그 출현을 알아챌 사람들에게 자주 묻고 다녔다. 논에 피는 꽃, 벼의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뭐! 벼 꽃? 아, 출수했냐고?"
벼의 경우는 꽃이 피는 시점을 개화라 부르기보다, 출수라고 일컫는 편이다. 이삭이 드러난다는 뜻의 '출수'가 벼의 생육 과정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삐쭉한 잎만 있던 벼에 통통한 이삭이 생기며 낱알이 드러나는 출수. 이 출수의 시기를 농부들은 고대한다. 그리고 출수 때 날씨가 맑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주길 기도하는데, 그때 볍씨 끝에서 잠깐 꽃이 피기 때문이다.

내가 벼의 꽃을 못 보고 산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벼꽃은 8월에서 9월, 주로 맑은 날 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사이, 30분에서 2시간 정도만 폈다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꽃의 전형적인 모양이 아니다. 낱알의 끄트머리에 작은 가루 같은 6개의 수술이 껍질 사이로 잠시 보이는 것이 벼꽃이다. 

슬쩍 보면 꽃이 아니라 마치 이삭에 흰 가루가 붙어 있는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봐야 이삭 하나에 달린 약 100개의 낱알에 하나씩 달린 꽃을 관찰할 수 있다. 낱알 껍질 사이로 나타난 수술이 꽃가루를 껍질 속 암술로 떨어뜨려 수정을 한다. 수정이 되기만 하면 다시 껍질이 닫혀 버리기 때문에, 벼의 꽃은 찰나에 피고 진다. 

많은 식물들에게 꽃은 중요하다. 꽃은 수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니까. 그런데 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잠깐 드러나는 6개의 수술이 암술에 꽃가루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낱알 하나가 여물지 못한다. 낱알 하나하나의 수정이 우리 밥상의 밥알 하나하나가 된다.

태어나 우유 먹었던 몇 개월을 빼면, 420개월 넘게 먹어 왔다. 매일매일을 먹고살았으면서도, 나는 한 알 한 알의 쌀이 생겨나는 과정을 420개월이 지나 이제야 처음으로 들여다본다. 볕 좋은 날 정오에 동네 앞 논에 나가 꽃을 보고, 다음 날은 옆 동네 논으로 가서 개화를 감상한다. 점점 쉽고 분명하게 알아보게 된다. 벼꽃의 존재와 변화를 알아채는 눈이 이제야 생겼다.

짧으면 30분에서 길면 2시간 정도 폈다 사라지는 꽃이 온 동네에 출현한 뒤, 낱알이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간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지나가고, 벼가 익는 계절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절이 여느 해 같이 않다. 홍콩에서 소녀를 부르는 애칭이라는 '링링'과 말레이시아의 메기과 민물고기 이름인 '타파'가 그 계절보다 먼저 찾아왔다. 

낱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탓에, 벼들은 강한 비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여기저기에서 쓰러졌다. 황금물결을 기대했던 나는 예상 밖의 풍경에 당황스럽다. 논 주인들의 마음은 그 벼들과 함께 넘어져 있다. 여즉 쓰러지지 않은 벼만이라도 추수하길 기다리고 있던 그 마음에 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지금은 미크로네시아라는 낯선 나라의 여성 이름이라는 '미탁'이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우리나라가 영향을 받는 7번째 태풍. 기상청이 태풍을 관측하기 시작한 1951년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여러 번 태풍의 영향을 받았던 해는 1959년이란다. 그 횟수가 7번이다. 하지만 미탁의 영향까지 받고 나면, 올 해가 1959년과 함께 최다 기록을 세운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의 횟수가 증가한 것도, 여름 아닌 가을에 이렇게 태풍이 들이닥치는 것도 바닷물의 온도가 증가한 탓이라 한다. 바닷물 온도가 높아진 것은 모든 환경 변화의 단골 정답인 '이상 기후' 탓이고. 기후 변화는 우리 동네 황금물결 풍경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계속해서 줄어들며, 매 해 새롭게 최저량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쌀 소비량. 쌀 밥 한 공기가 가진 무게와 의미는 이제 완전히 옛이야기가 됐다. 내 주변 농부들은 쌀 값이 폭락하고 온 국민이 쌀을 찾지 않는 시대가 온 것보다, 다 키워 놓은 벼가 비바람에 쓰러져 누워있는 것을 더 마음 아파한다. 

그런 농부들 사이에서 농부의 꿈을 키우는 나의 마음도 갈피를 못 잡는다. 쌀값이 똥값이 되었지만 누운 벼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 농부들을 보는 것이 속상하고- 세상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데 왜 우리나라 농협 창고에는 묵은쌀이 계속 쌓여만 있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하고- 이제야 벼꽃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지만 개화가 아무 소용없게 만들 수 있는 기후 변화에 점령된 세상이 막막하다.

태풍이 다가오는지 비바람이 거세진다. 벼들이 쓰러지지 않고 버텨주길 바라본다. 갈피를 못 잡는 내 마음도 함께 버텨주길 바란다.



링링과 타파 이후, 마을 앞 논의 벼들은 많이 쓰러졌다 (2019)



부족한 글솜씨에 이해가 되지 않을 분들을 위해...
벼의 개화 과정을 담은 EBS의 동영상이 참고가 되시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7208&cid=51642&categoryId=5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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