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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이 다채로운 색을 담은 ‘삶’ 그자체라는 것을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by 다시봄


삶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삶은 통으로 보면 한두 가지 색으로 된
직선처럼 보이지만,
조각으로 보면
그 모든 순간이 다채로운 색으로 꾸며져 있는
‘삶’ 그 자체다.



로랑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



‘한평생’만을 삶이라 할 수 있는 걸까?

알차게 보낸 오늘 하루, 새로운 도전을 한 반나절, 몰랐던 걸 알게 된 순간, 무엇인가에 설레던 찰나, 이 모든 게 삶이 아닐까?





삶은 얄궂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만 쏙쏙 걸러내고 이뤄준다.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어야 하지 않을까?

청하는 것이 신에게는 다르게 들리는 것인지

더 큰 계획이 인간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인지

어쨌든 삶은 나만 제외시키고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렇게 내가 바라는 삶을 쏙쏙 비켜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배제한 삶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까?


얼마 전 다니고 있는 성당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한 말씀이 인상 깊었다.

‘들어주지도 않는 기도 해서 뭐 하나?’

강론의 요지는 지금 당장이 아닌 한 사람의 삶 전체 안에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신에 대한 항변 내지는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신자들에 대한 위로였지만,

내가 인상 깊었다고 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들어주지도 않는 기도 해서 뭐 하나?

이뤄지지도 않을 것을 원해서 뭐 하나?


그래서 원하고 바라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있을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내게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가?

얄궂은 삶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뤄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로 나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고, 그러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이끈다.

더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빼앗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주기도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이다.

예측할 수 없기에 얼마나 다채로운 것을 품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다채로움을 느끼려면 모든 순간에 나를 녹여야 하지 않을까?

고개 숙이고 끌려다닐 게 아니라 고개를 들고 삶의 다양한 조각들을 온몸으로 느껴야 하지 않을까?





삶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삶은 통으로 보면
한두 가지 색으로 된 직선처럼 보이지만,
조각으로 보면
그 모든 순간이 다채로운 색으로 꾸며져 있는
‘삶’ 그 자체다.


나의 삶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하나의 삶이 완성되려면

조각의 삶들이 모두 이어져야 한다.

잘라내고 싶거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조각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온전히 모여야

삶이 완성된다.

모든 순간, 모든 조각에 담긴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삶이 소중하다.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화 [일주일에 한 번 부모님과 여행 갑니다]

수 [오늘보다 행복한 날은 없는 것처럼]

목 [영감 헌터]

금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토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2]

일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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