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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l 0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33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33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순례길


Hospital de Contesa은 호텔은 말할 것도 없고, 민박을 할만한 집도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혼자 잘 수 있는 방을 구하려던 마음을 포기하고 순례자 숙소를 찾아 하루 묵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갈증이 심해 우선 맥주 한잔을 하려고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이 마을엔 레스토랑도 하나 뿐이다), 레스토랑 앞에 방이 있다는 사인이 놓여 있었다. 스페인어로 쓰여져 있어 정확한 말을 다 알아보지는 못해도 ‘빈방 있음’이라는 단어는 여러번 봐서 알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텅 빈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중년 여성이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곧 그녀의 딸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와 방이 있다며 둘러보고 결정해도 된다며 앞장서서 이층으로 올라간다. 오래전에 지어진 돌건물, 매우 튼튼해 보이는 이층 건물의 일층은 레스토랑이고 이층은 방 서너개가 있어 민박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문 하나를 열어 들어가보라며 안내한다. 길쪽으로 난 창문은 제법 크고, 편안해보이는 침대, 작은 테이블과 옷장 하나. 간소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다. 아무리 깨끗해도 빈대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이정도면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 사실 더 알아볼 힘도 남아 있지 않다. 


깔끔한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자 몸이 노곤해진다. 배도 고프고 잠도 오고. 1층으로 내려가 순례자들을 위한 저녁 메뉴를 시켜 먹었다. 아주 작은 마을, 유일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은 최고의 맛이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손맛과 정성이 가득한 파스타와 생선요리에 곁들여진 와인까지. 북적대던 오 세이브로 민박집에서 묵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리 알 수 있는 건 없다. 더 걸어봐야 안다. 가봐야 내가 오늘 잘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미리 걱정할 일도, 미리 실망할 일도 없다. 


엊그제 못 잔 잠까지 푹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피한잔을 마신다. 옆 테이블엔 친구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백인 중년 남성 여럿이 큰 소리로 오늘 걸어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소란스럽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떨어진 지팡이를 짚으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을 피하려다 그만 커피를 내 옷에 쏟고 말았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짐도 꼼꼼히 다 싸서 방 열쇠도 다 주고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 빨래도 해야하고 짐을 풀어 옷도 갈아 입어야하니, 안그래도 출발 시간이 늦었는데 삼사시분은 더 지체될 게 뻔하다. 별거 아닌 일인데 오늘따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건지 기분도 자꾸 다운된다. 피로함인지, 무기력함인지, 오늘은 뒹굴뒹굴 하루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하지만 계속 걸어가야 한다. 


커피 묻은 옷을 빨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짐을 싸고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오늘은 조금만 걷자. 몸도 마음도 한없이 가라앉는 날이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아름다운 갈라시아 지방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동치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차분해진다. 남은 거리가 표시된 돌기둥을 만난다. 이 돌기둥은 갈라시아 지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산티아고 끝지점 직전까지 500미터마다 나온다. 

각가지 초록빛의 산등성이와 그 언덕배기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소들. 푸르른 하늘과 눈부신 흰 구름떼. 나도 모르게 자꾸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끝도 보이지 않는 길 양편으로 자유로이 움직이는 풍경.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멈춰서지 않는다.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른다. 내 걸음처럼 느릿느릿한 구름도 어느새 저 멀리 물러서 있고, 내 귓등을 훑고 지나간 바람은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다. 

천천히 걷고 또 걷는다. 줄어드는 돌기둥의 숫자들. 처음엔 반갑다가 너무 빨리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 한참을 걸어도 1킬로밖에 줄지 않았네라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오늘 벌써 십킬로나 걸어버렸잖아…


한달여전에 함께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들은 더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워낙 긴 여정이니 같은 속도로 걷는게 아니면 마주치기 쉽지 않다. 길 중간중간 우연처럼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라브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남자친구와 헤어져 아파하던 그녀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을까. 긴 휴가를 이 길 위에서 보내고 있는, 늘씬한 다리를 가진 마고는 이미 도착했겠지. 2000킬로를 걷는다던 벨기에에서 온 필립은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참을 앞서 가고 있겠지. 각자 조금씩 외롭게, 하지만 또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조지 아줌마도 아픈데 없이 잘 걷고 계셔야할텐데…딸처럼 아껴주시던 그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을 생각하다보니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시절 항상 옆에서 서로를 지켜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이삼년 연락없이 살다가도 문득문득 그리운 친구들, 서로 잘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과 지지를 주고 받는 친구들이다. 나 혼자 쌓아온 인생이라 생각하지만, 온전히 나 혼자 만들어온 건 없다. 나를 믿고 지켜봐주는 많은 사람들. 멀리 떨어져 보면 그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오늘은 Tricastella까지만 가야겠다. 17-8킬로 거리다. 11시에 출발했으니 4-5시나 되어야 도착할게다. 오래전 3개의 성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마을 입구부터 사설 알베르게 광고판들이 눈에 띈다. 산티아고에 다가갈수록 순례자들이 늘어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부터 약 100킬로 지점인 사리아 (saria,내일 도착할 지점) 부터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100킬로 이상만 걸으면 순례자증을 받을 수 있어, 짧은 휴가를 내거나 방학을 이용해 100킬로만 걷고 그 증서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작은 마을에도 순례자 숙소는 열댓개가 넘는다. 거기다가 크고 작은 호스텔 서너개, 호텔 두세개까지…숙소를 못 구할 일은 없겠다. 오늘도 작은 호텔이나 민박집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중급 호텔로 정했다. 호텔이라기보다는 호스텔. 배나온 주인 아저씨의 인상도 좋았고, 빨래서비스도 공짜로 해준다고 해서 모든 옷과 침낭까지 다시 다 빨아버렸다. 저녁도 수퍼마켓에서 사온 과일과 빵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침대에 누워 그동안 찍은 사진도 훑어 보고 일기도 쓴다. 오랫만의 편안한 쉼이다. 

 

Distance: Hospital - Triacastela (16km) 
Time for walking:  11:00 am – 5:00 pm 
Stay: 호텔 
A thing to throw away: 칠부 티셔츠 (불필요한 물건들은 거의 다 버린 것 같다. 이제는 필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덜 필요한 걸 골라 버린다. 얇은 칠부 티셔츠, 햇볕이 강한 날 입기 좋아했던 옷인데, 긴팔 셔츠가 하나 더 있으니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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