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국가경영진에 대한 작가지망생의 거부문
각 지역의 #시국선언 문 만큼도 잘 쓰지 못하는 한 작가지망생의 거부 선언문입니다.
언제쯤에야 나 자신이 제대로 된 시인이 될지 모르는 막연함에 여전히 허덕이고 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어려운 데다, 그보다 막막한 나의 마음을 달래는 것만으로도 힘겹기 때문이다. 언젠가 스스로를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시시콜콜한 사랑과 불투명한 미래의 당연한 투정을 부리는 시를 쓰고 싶다. 나이가 든 엄마 옆에서 여전히 어린 아들처럼 애교를 부려 그날 저녁 메뉴로 치킨을 먹고 싶기도 하다. 자유롭게.
24년 12월 3일 한밤중, 갑자기 사라진 나의 자유는 집 밖에 나가 시집을 읽는 일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아니지, 아직 무슨 자유가 빼앗겼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장갑차가 지하철역으로 가는 도로를 막은 것도 아니고, 하늘에 헬기가 나는 소리로 귀를 막고 지내는 것도 아니며, 디지털 드로잉을 배우러 가는 장소가 강제 폐쇄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한밤중, 뉴스를 보라는 친구의 메시지를 보고 켠 인터넷 방송에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터졌던 최루탄 연기가 온 머릿속에 모락모락 퍼져나갔다.
엄마가 70년대 초반, 종로 셋방에서 성장했던 시절. 초등학교도 중간에 관두고 일을 하러 올라온 서울은 매캐한 연기와 땅을 울리는 철소리로 가득했던 날들이 많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똑같은 소리만 나는 라디오나 TV의 이야기를 그저 ‘그러려니’하며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광주 외곽 작은 마을에 살던 엄마의 고모네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도저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고, 5월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역사 관련 글과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대학생 때 처음으로 엄마가 광주의 옆 동네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이런 상상을 했다. 엄마 자신과 외가 가족이 아니어도, 가까운 누군가가 모든 숨이 막히는 공포와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겪진 않았을까란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마 대학생 때였던 것 같다.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의 공간이 막히고 행동이 제약되며, 나아가 잘못된 꼬리표를 달게 되는 상황. 내가 태어나기 8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그 현장에 가까이 살던 엄마도 어떤 경험이 있진 않았나 엄마의 역사를 들어보고, 어떤 생각과 심정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엄마는 직접 겪은 것이 없어 크게 이야기해 줄 건 없지만, 자신의 고모가 살던 광주와 거기서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색을 씌우려는 사람들을 보면 자동적으로 피가 거꾸로 솟고 반발감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라는 농담은 그저 사태를 가볍게 말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나라 국민으로 살면서 김연아 선수나 <기생충>이나 한강 같은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함께 경험한다는 게 신기해서 이 말을 종종 썼다. 그리고 이럴 때도 썼다.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아빠와 엄마가 길거리로 내몰리고, 아이들이 불타고,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이 가라앉고, 사람들이 길에서 촛불을 들고, 대통령이 탄핵되고, 스페인독감보다 지독한 병균이 퍼지고, 자유롭고 싶던 내 친구도 깔려 죽을 뻔했을 때도 썼었다. (전혀 그런 환희와 존경을 깎아내리거나, 무거운 슬픔과 분노를 별 것 취급하는 의미로 쓴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나열하다 보니 이런 경솔함을 인식하지 못한 점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여 지인들이 나의 이런 표현에 마음속에서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다만, 코앞에 놓였던 바늘구멍, 과거 ‘출세’라 불릴 만큼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며 미리 성공해야 한다는 무거운 공기, 내가 열성을 다하는 이유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도 달성하지 못하고 나태로 치부되기 쉬운 곳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 그리고 과정의 예상을 너무 쉽게 뛰어넘어 극도로 반짝이는 삶에 닿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혐오를 겪으며 살다 보니, 정말 나의 삶에서 적어도 잠드는 시간이나 시집을 읽는 시간만큼은 아무 일과 걱정도 없이 누리고 싶은 자유가 항상 앞섰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나와 주변 사람들이 별일 없기를 바랐고, 이런 마음에서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일도 겪을 줄 몰랐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가까운 사람들의 사정이나 마음을 돌보기는커녕 나 자신 하나도 하루를 잘 지낼 수 있도록 달래고 다그치며 에너지를 쏟아 정돈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아마 누군가는 ‘나이가 들면서 그런 건 자연스럽게 겪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뭐, 당장 코앞에 쌓인 분리수거 봉투마저도 비우러 가기 힘든 나는 이 말에 일부 동의한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러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벗어나 다른 것까지 내 불안을 누르고 신경 쓸 여유가 점점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하루가 나의 자유 내에서 편하게 선택되지 않거나, 흔들리는 불안을 느끼고 싶지 않다. 요즘은 내 힘을 벗어나는데 내 하루를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길 바란다.
때문에 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과도한 대가를 누리는 것에 부당함을 느낀다. 그래서 12월 3일 한밤중에 일어난 사태와 그 이후의 나흘이 내 속에서 무성한 상상과 불안을 키우며 많은 힘을 소모하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으로서, 국가 경영자들이 제대로 된 일을 하길 바라는 것이 사치일 정도인가? 이제 내 미래와 지인의 안전이 더 갑갑한 안갯속으로 빠지지 않던 24년 12월 2일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내 미래가 개벽할 정도로 엄청나게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번아웃으로 퇴사한 지 1년이 넘어서야 이제서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꿈꾸기 시작했다. 더 편한 마음으로 시집을 들고 카페나 공원에 가서 글을 읽고, 내 글에 대한 영감과 감상을 키워나가고 싶다는 꿈을 겨우 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혼란을 쌓아온 제 할 일 못하는 국가 경영진을 원하지 않는다.
1분에 뉴스가 수백 개씩 쏟아지는 요 나흘 동안, 나는 만나보지도 못했고 엄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엄마의 고모네와 그들의 지인들이 겪었던 1980년을 꿈에서 겪고 있다. 다행히도 모든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항상 일어나면 매캐한 어떤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는 기분이다. 군에서 전역한 지도 십수 년이 지나 화생방 냄새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맡아본 적도 없는 최루탄의 기억, 그리고 온몸을 누르는 자유의 상실감으로 매번 무겁게 잠에서 깨어난다.
선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일, 나는 내 방식대로 나의 위치에서 이를 거부하거나 피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통상 돈과 종교 이야기와 묶여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여전히 정치 이야기를 어떤 색 페인트로 두텁게 덧칠해 놓은지 확인하며 대화하는 자리는 불편하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자유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이러지 말아라.’ ‘거부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대통령과 그의 부역자들을 나의 일상에서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