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라고 아시는지
별다른 이유 없이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이 치미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랬는데,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평범하게 괴로운 날일 뿐인데(날씨 습하고 더움, 출퇴근 길 차 미친듯이 막힘, 주말 끝나고 출근함) 성격파탄자처럼 짜증이 났고 그런 나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나는 그런 날이었다. 오늘 어느 정도로 신경이 예민했냐면, 저녁에 폭우가 내린다고 해서 차에 새똥 묻은 것도 어느 정도 좀 닦이겠지 생각했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은 것도 짜증났다. 차에서 내려, 차 뒤쪽에 묻은 새똥을 보며 또 다시 욕을 하고, 너무 더워서 지금 밖에서 차 닦고 있을 기력도 안 나니 이것도 회피하자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어지러운 살림살이들을 대충 치워 앉을 자리만 만든 식탁에 사온 저녁밥을 풀어놓고, 엔시티 드림 9주년 라이브 방송을 틀었는데, 나보다 10살 넘게 어린 아이돌들의 사회생활 연차가 나랑 똑같다는 것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20대인 연예인들이 자기들이 10대 때 처음 그 일을 시작했을때부터 시작해서 거진 10년간 있었던 일을 자기들끼리 반추하고 있는거다.
'반추해 본다'는 행위에 갑자기 몰두해서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들어갔다. 여행을 가면 있는 자리에서 스토리를 많이 올린 뒤에, 집에 돌아와서 그 스토리들을 엮어서 "하이라이트"를 만든다. 그리고 매월 말일이 되면 해당 달을 리캡하는 사진들을 추려서 빼먹지 않고 월별 포스팅을 꼭 하고 있는데, 갑자기 최근 포스팅들을 살펴 보다가 왜 이렇게 구린 사진만 셀렉했지 싶은거다.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것처럼 내 시간들이 비어있는 느낌이 들어 갑자기 또 브런치에 들어와 2024년, 2023년 포스팅까지 시간 역순으로 돌아보고 내친 김에 그간 썼던 여행기와 드문드문 써 둔 에세이들을 정독했다. 2023년까지 써둔 글들은 뭐랄까... '이게 정말 내가 쓴 글이라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내러티브의 기승전결부터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맛깔나고, 묘사는 사진처럼 생생하고 후각과 촉각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감상적이었다. 그런데 2024년부터 쓴 글들부터는 엉망진창인거다. 마치 어디 숨어서 누구한테 쫓기며 쓴 글처럼, 문장 어순이나 어휘가 엉망진창이고,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긴한데 갑자기 전원이 팍 꺼진 사람처럼 중간에 이야기가 끊겨있다. 심지어 대놓고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강박 때문에 피곤하니까 그만 쓰겠다'라고 쓰고 중간에 끊어버린 글도 있다.
이 변화가 엄청 웃겼다. 2024년에는 오히려 개인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직장으로 이직했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주5회 일정거리를 매일 통근하다 보니 살도 빠지고 안색도 좋아지고 근육량도 훨씬 늘었다. 매일 출퇴근을 하니까 운동 시간을 확보하려고, 필라테스와 테니스 스케줄을 모두 주말로 옮겨두어서 주말에는 1. 운동 2. 씻음 3. 1과 2를 하고 남는 시간에 사람을 만나거나 여가 활동을 함- 이 순서대로 중요도를 지키고 있는데, 결국 수면시간과 운동시간을 다 지키고 거기다 몸까지 깨끗이 씻고 나오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기분이 꽤나 괜찮아져 버린다. 기분이 꽤 괜찮을 때, 그러니까 세상에 대해서든 자아에 대해서든 부조리함을 체감하고 있지 않을 때는, 예리하게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든 거다. 작가든 음악가든 예술가들이 건실하기 힘든 이유, 혹은 반대로 건실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기 힘든 이유를 너무 알겠다. 건실하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건성으로 관찰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자신이나 세상을 그렇게 면밀히 관찰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평범하게 성실한 사람인 것이다. 직업을 가지고나서 거진 단 한 순간도 내가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란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건실해져버린 나'를 발견하고 10년을 꽉 채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자의든 타의든 실직의 시기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불성실한 내가 10년을 꼬박 채워 버텨버리고 나니 역설적으로 객관적으로 나만큼 성실한 사람도 드물잖아, 싶은 것이다.
엉망이 된 글 밖에 못 쓰는 성실한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계속 열심히 일하고, 많지는 않지만 쉬지않고 돈을 벌고있다. 중간중간 여행도 가고 친구들과 파티도 즐기고 혼자서 휴양도 했다. 이렇게 쓰니까 여피족이 따로 없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친구들과 했던 여행이나 혼자 했던 휴양에 대해서도 이전처럼 구구절절 다 써놓지 않으면 정말 그냥 재미없는 여피의 생활 같아서, 내일 밤에는 2024년에 한 여행들부터 하나하나 자세히 쓰기로 결심한다. 존재는 본질에 선행하는 것이니까... 뭐 누가 그리 읽어주기야 하겠느냐만 쓴다는 행위로 나 자신을 정의 할 수 있겠지. 아님 그냥 열심히 일기 쓴 사람 되는 거고. 어쨌든 그냥 결심한다고만 하면 또 잊어버리니, 2024년 6월에 한 홍콩 여행과 2025년 1월에 한 시드니 여행에 대해 자세히 쓰겠다고 적어둔다.
그러니까 벌써 2025년이고 나는 30대 중반인데,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적어보면 나도 정말 꽤나 최선을 다하며 살만큼 살았구나 생각하다가도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갑자기 인생 일장춘몽이구나, 금방 죽을 날이 올텐데 참 삶이 허무하네, 싶다. 오늘처럼 모든 것이 평범한데도 다 잘못 됐다고 느껴지는 날 밤, 매일 매 순간 뭔가를 쓰거나 말해 둔 내 자신을 되짚으면서 위로를 느끼는데.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위로하는 게 이상한걸까? 남들도 다 이런걸까? 매일 친구들이며 직장동료들이며 심지어 부모님까지 붙잡고도 수다를 떠는데 그것도 모자라 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뭔가를 써야 하고, 뭐 이렇게 내 속에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싶었는데, 결국은 깊숙한 안 쪽에 자리잡은 어떤 갑갑함을 이겨내기 위함인가. 나이도 어리고 돈도 없을 때(지금 부자라는게 아니라 어릴 땐 진짜 돈이 너무 없었음)는 그게 불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불안이 맞았을 텐데, 불안이 자그마해지니까 그 빈 공간을 권태라는 감정이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 결국 내 깊숙한 본질까지 완전히 성실해지진 못했구나.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진 않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