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결국엔 또 술을 마셨다.

by Aner병문

소띠 사매들과, 장 사범님과, 한 시간 동안 오래오래 치고 받은 다음 날이었다. 의지는 칼처럼 선명했는데, 관절마다 찢어지는듯 아파서 기본 찌르기조차 할 수 없었다. 과히 훈련한 탓이 아니라 몸 자체가 약한 탓이었다. 온 몸에 추를 단 듯 무거웠다. 빗방울이 하루종일 내리그었고, 나는 책조차 읽을 수 없어 방바닥에 누워 멍하였다. CJ와 영어 공부를 한 시간 겨우 마치고, 수영장에 간 아내를 대신하여 나는 당연히 딸을 돌보았는데, 나는 딸과 놀면서도 술 생각이 가실 줄을 몰랐다. 그때 동생의 우중운전을 봐주시던 아버지도 손녀가 보고 싶고 술을 곁들이고 싶어하시어 결국 소주 세 병은 문제도 아니었다. 술은 눈물처럼 녹았다. 어쨌든 없는 솜씨에 아무리 열을 다해도 내 무공은 여전히 무디었는데 그보다 오래 읽고 쓴 문장 역시 녹슬고 보이기 부끄러워 나는 도대체 내 삶에 무엇이 남나 생각했다. 무릇 부모라면 제 삶의 끝부터 자식을 출발시켜 오류를 줄여할진대, 내 딸은 철들어 이 아비의 삶을 들여볼작시면 쓸데없는 책과 술병과 땀에 절은 도복, 띠나 볼 뿐이니 아비를 한심히 여길 터이다. 딸은 하루하루 커서 기기조차 거부하고 늘 두 발로 빳빳이 서서 사방을 쏘다니며 제 몸으로 부딪쳐 다 부수고 흩어내고 겪어내기 여념이 없는데 이 아비는 술에 절어 약한 소리만 한다. 수없이 싸웠으나 당당히 이긴 적이 없고, 하염없이 읽었으나 이룬 게 없으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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