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ITF 번외편 ㅡ 배움에 대하여

by Aner병문

아직 부모님과 나 사이의 골이 깊어 데면데면 철없던 총각 시절의 이야기다. 도장에서 막 색깔 띠를 매고 훈련하려던 차에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 당시엔 결혼도 못하고 앞날도 불투명한 녀석이 무슨 돈 들여 태권도냐며 못마땅해하신지라 또 한 말씀 하시겠구나 싶어 시큰둥하게 받았더니 아버지는 딱딱하게 말씀하셨다. 전기세 좀 계산할 일이 있는데 말이여, 이거 되겄냐. 카카오톡으로 자세한 얘기를 들여다보니 결국 총 전기세에서 각 가구가 쓴만큼 나눠 전기세를 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간단히 풀어 답을 보내놓고 땀흘렸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 불은 켜져 있었다. 술이나 한 잔 몰래 얻어마시고 늦게 돌아오는 날에 거실 불이 켜져 있으면, 속 끓어 아니 주무시는 부모님과 밤새워 다퉜기에 가슴을 졸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빈 공책과 연필을 두고 앉아계셨다. 야, 너 아까 그거 어쯔케 풀었다고? 다시 좀 알려줘봐라잉. 나는 각 가구가 하루에 쓴 전기세를 미지값으로 놓고 전체 일수를 곱한 뒤 다시 나누어 역산하는 일차방정식을 만든 뒤 그 것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철학의 논리를 수식으로 표현한 학문이 결국 수학임을 겨우 깨달았지만 그 때 나는 이미 수능본 지 십 년이 넘은, 상아탑의 퇴물이었다. 공식을 외워 겨우 따라가던 내 산술은 결국 고등학교 공통수학 과정을 넘지 못했다. 다만 그 때 기억을 더듬어 일차방정식 정도는 만들어 풀 수 있었다. 나는 밤늦도록, 메마르고 담담하게 부모님께 이 계산의 방식을 설명해드렸다. 한참만에 수식을 이해하신 아버지께서는 주름진 손으로 내가 잔뜩 휘갈겨넣은 숫자들을 쓰다듬으셨다. 사람이 이래서...배와야 헌당게, 배와야 하는 거여. 아버지의 눈가는 소주를 드신듯 붉었다. 대기업에서 오래 일하신 분인데도 그랬다.



회사에서 가끔 내게 묻는다. 형님은 영어도 잘하고, 태권도도 하시고, 한자도 다 읽고, 일어 중국어도 대충은 하시고, 비결이 뭐예요? 그때마다 나는 씩 웃고 만다. 아, 잘하긴 멋을 잘혀, 몇 마디 찌끄리고 말제, 그래도 돈 들여 배웠응게. 나는 솔직히 운전도 서툴고 못질도 못하고 신발 끈도 잘 못 묶는다. 게임도 길어야 하루 십 분 한다. 그러므로 세련된 젊은 세대들이 비호처럼 시대를 앞서 달려나갈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만 꾸준히 반복했다. 한자는 어렸을때부터 어머니께 익혔고, 영어와 태권도는 돈 들여 따로 시간 내어 배우니 솔직히 아예 못하면 인생을 낭비한 셈이고, 일어나 중국어, 스뻬인어는 취미삼아 유튜브 뒤적이며 한두마디 웅얼웅얼한다. 내가 미처 접해보지 못한 세상은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아 흉내내보기도 한다. 세상엔 아직도 먹을게 없어 진흙으로 빵을 굽고, 벌레가 들끓는 물에 약을 타서 마시며,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바위 밑에서 별빛을 비춰 책을 보고, 모래밭에서 맨몸으로 태권도를 익히는 이들이 있다. 배 곯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음껏 가질 수 있는 사회에 살게된 우연한 행운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영어 방송 틀어놓고 한 시간 반 부지런히 했습니다. 요즘 몸이 좀 빵빵...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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