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인생이야기

by leaves

비님이 오신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퍼붓는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비는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게 하는 전령사이다. 날씨는 점점 더 선선해 지고 곧 겨울이 올 것이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있다보면 습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차와 물을 번갈아 계속 마셔보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있다. 그럴때 시원하게 비가 내리면 옷을 입은채 샤워라도 하는 기분이다. 규칙적인 빗소리는 안정감을 준다. 그럴때 깊이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흐르는 빗물처럼 그냥 길이 난데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로 그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채 여행을 떠난 기분이랄까. 비에 젖은 은행나뭇잎을 보니 생각나는 나무가 있다. 바로 여고시절 교정을 노랗게 물들이던 은행나무다. 학교의 역사만큼 오래된 나무는 크고 나뭇잎도 유난히 많았다. 그 나뭇잎이 바닥에 떨어지면 보도블록은 온통 노란색 세상이었다. 나는 학교를 참 좋아했다. 우리 학교는 추계예대와 함께 있어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아침이 되면 성악하는 사람들이 목을 푸는 소리가 웅장하게 퍼지고 트럼팻 등 악기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언젠가 나도 멋진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화구를 들고 다니는 미대생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야간 자율학습시간에는 선생님 몰래 친구와 교실을 빠져 나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아현동 산동네가 빛나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결정된 것 없는 미지의 상태가 불안하기만 했지만 왠지 모든게 잘 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란 은행잎 길처럼 환한 미래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하고 싶은 것도 모호했고 애써 노력도 하지 않았던 내가 떠오른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나의 대학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선후배들 모두 유쾌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영화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야말로 꿈을 이룬 셈이다. 박봉에 일은 고됐지만 나는 그야말로 날라 다녔다. 주말에 일하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영화현장을 보며 일을 하는 것이 하루하루가 신나는 경험이었다. 결국 그러다 번아웃이 왔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뒤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주어진 길을 따랐던 것 같다. 이제는 그것도 오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어쩌다 아현역 앞을 지날때면 꼬박 3년동안 내가 사랑했던 나의 고등학교가 떠올라 설레는 마음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했을까. 아마도 좀 더 멋진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 진다. 누구에게나 강은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도 큰 줄기를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멋진 꿈을 꿀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그랬다면 좀 더 달라졌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또 한번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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