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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Feb 09. 2021

일 년 만에 내 아이가 원어민이 될 수 있을까.

<영어라면 질색했던 아이가 보여준 변화>


사실 걱정된 건 큰애였다.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나는 열한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조기 유학길에 오를 큰애가 이곳의 공교육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큰애는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나이에 뉴질랜드로 건너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나이는 언어를 배우기에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린 나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나는 네 돌도 안 되어 뉴질랜드에 오게 된 삼둥이보다 큰애가 적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애는 영어유치원에 다니지 않은 평균 수준의 아이였다. 내가 살았던 강남구 도곡동이라는 동네는 치맛바람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영어유치원은 예사고 하이레벨의 영어학원에 보내기 위해 방학 동안 원어민 과외를 붙일 정도라면 이곳이 대강 어떤 분위기였을지 그려질 것이다. 결혼을 하고 시댁 근처인 이곳에 자연스럽게 둥지를 틀었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태어나 학군이라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란 나에게 강남의 이런 분위기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면 좋은 아이로 키울 수 있는 걸까.

아이를 키우며 나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소신을 갖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모험이다. 내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순간의 결정, 누구나 부모가 되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것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대치동 학원가 근처에 자리 잡은 은마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수많은 부모들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남에 입성한다는 낯부끄러운 표현, 그러나 지금까지 축적된 수많은 데이터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강남 8학군에서 교육받은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 어쩌면 삶이란 시작점부터 공정하지 못한 싸움이었다. 주변에서는 이곳을 걷어차고 뉴질랜드로 온 나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시어머니부터가 미국, 영국도 아닌 겨우 인구수 500만의 뉴질랜드라는 나라를 왜 선택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큰애는 어려서부터 영어라면 질색을 했던 아이였다. 학창 시절, 과목 중에서 영어를 가장 좋아했던 나로서는 그런 아이가 가끔은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나는 특별한 사교육 없이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영어를 접했고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험을 보게 되어 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에 진학했다. 영문법, 영어 독해, 영어회화, 영미문화. 하루 수업의 절반 이상이 영어로 채워졌다. 수업은 재미있었지만 솔직히 친구들과의 경쟁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를 잘하는 각 지역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우리 반에는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리터니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영어는 내 영어의 뇌구조와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거쳐 영어를 말했지만, 그들에게는 그 과정이 없었다. 원어민처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영어는 결국 언어이기에, 교육이 아니라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뉴질랜드에 온 이유 중 하나도 그런 나의 유년의 경험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 아이는 영어라는 언어를 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교육이 아닌 삶이 될 때 경험할 수 있는 확장된 삶의 바운더리를 내 아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큰애의 영어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3학기가 시작된 이후였다. (이곳은 일 년이 4학기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아이가 별 탈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했기에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다.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의 리딩 레벨을 체크하며 선생님과 상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아이의 영어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건 교내 스피치 대회가 있던 때였다. 안타깝게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반에서 4등을 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이후 큰애는 여러 성과를 보여주었다. 대학 주최 수학 시험에서 상을 받아오기도 했고, 연말에 시행된 국제학생 영어평가에서 전체 2등을 하기도 했다. 큰애의 점수는 뉴질랜드에 2년 동안 체류한 어느 일본 학생과 동점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출을 할 때마다 큰애의 영어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영어는 정말 달라져있었다. 물론 원어민 같은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자기표현에 스스럼이 없었다. 이 정도 속도면 정말 몇 년 안에는 원어민 같은 자기표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Bilingual, 영어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가 되는 과정은 더욱 그러했다. 하나의 기대는 걱정으로 변했고, 또 다른 걱정은 기대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걱정은 삼둥이였다. 이곳에 온지도 일 년이 지났지만 삼둥이의 영어 실력은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내 생각대로라면 네 돌이 되기도 전에 이곳에 온 아이들은 그야말로 새하얀 백지여야 했다. 언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어릴수록 폭신폭신한 스펀지처럼 더욱 빨리 흡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언어의 마법이 아니던가. 어린아이들이 한국말을 까먹게 되면 어쩌지.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언어는 어릴수록 배우기 쉬울 거라는 가설. 그러나 그 가설에는, 더욱이 이중 언어에 대해서는, 여러 변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성향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열린 자세로 언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있느냐 였다. 큰애는 어릴 때부터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아이였지만, 매우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반에서 회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좋았다. 말하려는 욕구는 어찌나 강한지 학교에 다녀오면 굳이 묻지 않아도 미주알고주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술술 말하는 딸 같은 아들이었다. 뉴질랜드에 와서도 아이는 친구들과 쉽게 친해졌다. 그저 친구들과 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언어가 향상된 것이다.   



   

뉴질랜드의 아이들은 시골 아이처럼 순수한 편이어서 인종차별, 왕따 같은 이슈가 거의 없다. 학교 측에서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도 크다. 한 저학년 반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남자아이들이 한 국제 학생에게만 공을 주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엄마가 교장에게 컴플레인했다고 한다. 교장은 그 장소에 있었던 아이들 모두의 부모를 소집하여 그날의 행동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공립학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학교에 교과서가 없다는 것이고, 학교별로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국제학생 유치다. 국제학생을 유치하면 도메스틱 학생의 기부금보다 수십 배에 달하는 기금을 확보할 수 있기에 국제학생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한다. 공립학교 내에 국제학생을 위한 오피스를 설치하여 ESOL 클래스와 같은 보조 영어 수업을 수준별로 운영하기도 하고, 반 내에 버디를 만들어 국제학생의 적응을 돕기도 한다. 물론, 이런 환경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국제학생도 더러 있다. 시스템은 최소한의 것이기에 개인의 노력 없이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노력. 그것은 바로 얼마나 그 환경에 흡수될 수 있느냐의 자세다. 그리고 나는 삼둥이에게 그것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둥이는 선천적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들을 갖고 태어났다. 이에 서로 의지하는 경향이 컸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려는 노력도 없었다. 셋이 하나의 공간에 함께 적응했기에 적응속도는 초반에는 더 빨랐을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그래프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며 한국말만 사용했고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며 같이 놀자고 하는데도 용기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영어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다. 간신히 기초적인 단어를 이야기하는 정도이다. 언어적인 문제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세 아이들은 아직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들만의 세계에만 빠져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들은 점점 자신의 색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침에는 서로 다른 옷을 입겠다고 하고, 미술, 음악, 체육 등 좋아하는 분야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삼둥이가 아니라, 아이들은 점점 시완, 시원, 시호라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아들 넷의 고유의 세계를 서포트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존중하고 개발해주는 것이 내게 남은 몫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바로 독립성을 갖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번에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시완이를 유치원 상위 반으로 옮기는 실험이다. 연령상 셋이 한 번에 옮겨야 했지만 아이들의 독립성 문제 때문에 몇 달간의 시간차를 두고 옮기기로 결정했다. 홀로 떨어진 시완이는 2주가 지났지만 아직도 적응 중이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과 여러 방법을 함께 고민하며 선생님이 요청할 때마다 수업에 함께 참여하거나 한국어/영어로 된 번역된 자료들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 더욱이 아들 넷의 엄마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아이들은 기저귀를 떼고, 서고, 걷고, 뛰고, 말하고, 이해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사람다워지고 있다. 육아는 끝이 없다. 어제의 내 걱정은 지금껏 그래 왔듯 오늘의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것이며, 오늘의 새로운 걱정은 늘 그러하듯 뿌연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싶다. 지금껏 지녀왔던 소신을 지켜나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그것이 정답이든, 정답이 아니든.

어쩌면 삶에는 애초에 정답 같은 것은 없을 테니까.








한국말만 쓰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선생님이 요청한 자료. (내가 만든 자료들)



(왼쪽 위) 아이들 수업에 참여했던 날 (오른쪽 위) 크리스마스 파티에 아이들을 위해 만든 코스튬 - 크리스마스 트리 2와 엔젤 1


큰애 (오른쪽)와 큰애의 친구들


스피치 대회를 연습하는 큰애 - 6개월 만에 보여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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