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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 Sep 02. 2022

여행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뮌헨, 독일


“이게 아직도 여기 있었네?”

딸아이 손에 작은 물건이 들려있다. 내 입가에도 스윽 미소가 번졌다.

“그걸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 우리의 추억이 담긴 물건인데.”

“엄마, 생각난 김에 한판 붙어볼까?”

 

얼마만인가? 보고 싶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소리칠 즈음, 딸아이가 한 번씩 손님처럼 다녀간다. 떨어져 사는 것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귀국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 딸아이가 오기 며칠 전부터는 집안 대청소를 시작한다. 특히 딸 방은 신경 써서 정리한다. 딸이 미국에 간 이후로 그녀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을 하나씩 버렸다. 한꺼번에 버리면 빈자리가 느껴질 것 같아 하나씩 정리하곤 했다. 딸의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물건일수록 주저함이 많았다. 아기 때 만지고 놀던 장난감, 수십 번씩 읽었던 동화책, 여행 중에 샀던 놀잇감...... 그렇다. 여행지에서 데려온 물건들은 단 하나도 버릴 수 없었다. 먼지라도 앉을까 고이고이 상자 안에 담아놓았다.

딸아이가 조심스레 자기 방에 들어선다. 한참을 서서 자신의 물건들과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 무엇인가를 집어 들고는 진귀한 물건이라도 발견한 양 이리저리 뒤집어본다. 반가움이 얼굴에 묻어난다.

 

뮌헨 마리엔 광장을 걷고 있었다. 오르골 연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딸아이와 나도 뒤질세라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인형들의 춤사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딸아이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종탑에서 나오고 들어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형들을 바라본다. 뮌헨의 마리엔 광장에서 한바탕 신나는 의식이 펼쳐진다.

상점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딸아이가 갑자기 손을 잡아끈다.

“왜? 어디가려고?”

“엄마, 저거 사줘.”

딸아이 손에 이끌려 자그마한 기프트 숍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면 먼지가 수북이 쌓여 알아보기도 힘든 작은 종이상자였다.

“이게 뭔데?”

무거워져가는 짐 때문에, 열쇠고리 하나 사는 것도 신중했던 터라 그게 무엇이든 사지말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쓰지 않는 아이가 꼭 갖고 싶다고 조르는 것이 아닌가.

 

뮌헨에서 기차가 출발한다. 딸은 가방에서 아까 산 물건을 꺼낸다. 내가 짐정리를 마치고 자리에 앉기만을 빤히 바라본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준비되었냐는 듯 눈빛을 보낸다. 곧 그녀의 빠른 손놀림이 시작된다. 기차에서 시간 보내는 아주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이라도 한 듯 눈이 번쩍했다. 적어도 뮌헨 이후의 기차 여행은 딸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만, 기차를 몇 시간 타느냐에 따라 나의 ‘노동시간’이 결정되었다. 유일하게 쉴 수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을 카드게임에 온전히 내주어야 했으니까.

                                       카드게임 즐기며 기차여행(2012년)

 

오랜만에 딸아이의 신중한 표정을 읽는다. 열 살 때 기차에서 보았던 눈빛 그대로이다.

“우노!”

딸아이가 힘차게 외친다. 오래전 기차에서 들렸던 그 소리! 손에 들고 있던 남은 카드 두 장 중에서 한 장을 바닥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소리친다. 카드가 한 장 남았을 때 ‘우노’라고 먼저 외쳐야 마지막 카드를 없앨 기회를 얻고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딸아이 순발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우노(UNO)카드’를  뮌헨에서 처음 보았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즐겨했던 카드 게임이란다. 여행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딸은 우연히 뮌헨에서 우노 카드를 발견했다. 이틀이 멀다하고 탔던 기차에서 카드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우노’를 너무 크게 외쳐 같은 기차 칸에 탔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던 일도 있었다.

어렸을 적 기차여행에서만큼 게임이 재밌지는 않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비록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손보다 훨씬 커졌지만, 카드게임은 한동안 우리를 유럽기차여행으로 데려다 주기에 충분했다.

 

딸아이가 유학을 떠난 지 여러해가 되어간다. 딸 생각을 할 때마다 진정 긴 여행을 떠났구나 싶을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알 수 없는 항해를 떠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가족이 언제 다시 함께 살 수 있을지, 항해가 너무 고되고 힘들지 않을지......

그럼에도 딸이 쉽사리 항해를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딸아이 마음을 단단히 잡아줄 돛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 년 간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라는 돛을 달고,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딸에게, 이십 년이라는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가장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엄마와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결코 다시 오지 못할 간들.

우노 카드는 이제 손때 묻은 너덜거리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 마음을 잔잔하게 붙들어 줄 수 있는 추억 한 조각은, 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여행노트에서 꺼낸 추억 이야기 9.

                           -2012년 열 살이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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