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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균의 코드블랙 Mar 31. 2020

진솔의 지휘봉은 희망을 그린다


완숙한 절정에 올랐을 때보다 완성을 위한 과정이야말로 감동의 여운은 더욱 진할 겁니다. 본인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성, 완성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더 컨덕터’(감독 마리아 피터스)는 미국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생애를 다룬 영화다. 그녀의 지휘자로서의 삶에 유독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붙은 이유는 당시 흔치 않았던 마에스트라(maestra)의 존재 때문일 터다. 마에스트로(mastro) 사이에서 편견을 극복한 그의 삶은 시대와 인종, 성별을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첫 인터뷰이는 영화 ‘더 컨덕터’로 짐작할 수 있듯 진솔(32) 지휘자다.     

 

“코로나19 이후로 공연의 95%, 아니 100%가 취소되었어요.”


최근 클래식계의 동향을 묻는 질문에 진솔 지휘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 서초 부근의 한 카페. 진 지휘자가 청바지에 핑크색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났다. 오케스트라와 청중을 좌지우지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앳된 느낌마저 들었다.   


진 지휘자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국립음대에서 수학 후 바덴바덴 필하모니, 캄머오케스터 하일브론, 남독일 필하모니 콘스탄츠, 캄머오케스터 포츠하임, 불가리아 플로프디프 주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등 해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독일 현지 언론은 그를 “앞으로 꼭 주목해야 할 지휘자”, “자유로운 지휘봉 놀림을 가진 신예”로 평가했다.


귀국 후에도 코리안 심포니오케스트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천필하모닉, 전주시립교향악단 등을 지휘한데 이어 말러리안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고 있다. 대구MBC교향약단 전임 지휘자이자, 게임음악 플랫폼인 플래직의 대표, 예술단체 말러리안의 예술감독, 한국예술영재교육원과 서울시학생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등…. 주목받는 신예 지휘자로 종횡무진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코로나19는 뜻밖의 쉼표가 되었다. 기자는 평소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지휘 중에 무슨 생각을 하세요?” 대답은 알듯모를듯했다. “무대의 공기를 살피느라 머릿속이 항상 복잡해요.”   

   

'여성' 수식어 대신...


- 오케스트라를 앞에 두고 지휘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세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죠. 흔히들 연주자가 객석이 본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지휘자를 바라봐요. 객석의 시선도 대개 지휘자를 향해있죠. 지휘자는 표현하려는 음악을 떠올리면서 단원들의 컨디션도 챙겨야 합니다. 연주 중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계속 터지는 데 그걸 조절하는 것도 지휘자가 해결해야 할 몫이고요. 지휘자가 매료된 것은 이렇게 무대의 공기를 쥐락펴락하면서도 들리지 않는 말을 건네는 모습 때문이었어요.”


- 지휘자라고 하면 카리스마 넘치게 지휘봉을 젓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속사정은 또 다르군요.


“고독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달까요?(웃음)”


- 저 같은 클래식 문외한에게 여성 지휘자는 사실 좀 낯설어요. 본인은 좋은 점도 그렇지 않은 점도 있을 것 같은데.


“이색적이다? 튄다? 한 번 더 보게 된다? 장점이라면 이런 것들 밖에 없어요(웃음). 지휘자가 어떤 사람이냐, 얼마나 끈질기냐가 더 중요한 판단의 요소일겁니다. 잠깐 화제가 될 순 있지만, 지속적으로 해내는 것이야 말로 그 지휘자의 역량일 테니까요. 그런데 또 그런 끈질김이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웃음)


“9년 전 쯤일거예요. 여성 지휘자가 이끈 오케스트라 공연이 끝나고 관람객 여러 명이 불평을 늘어놓더라고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어떻게 여자가 지휘를 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반응이 당시만 해도 자연스웠어요. 유학 후 수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양성평등이 중요한 사회적 화두가 되어 있었어요.”


- 저부터도 ‘지휘자’ 앞에 ‘여성’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좀 지겨울 것 같더군요.(웃음)  


“솔직히 절 지휘자로만 봐주길 바라지만 ‘여성’을 붙이는 게 편한지, 아니면 이도저도 애매하기 때문일지는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음… 수식어를 꼭 붙여야 한다면 ‘도전적인’ 진솔 지휘자가 어떨까.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거든요.”


- 바꿔 말하면 일 벌리기를 좋아한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자제하곤 있어요.(웃음) 나서길 즐기는 성격은 아니에요. 말러리안과 플래직도 소위 ‘총대’를 맨 케이스라니까요.(웃음) 그렇지만 이왕 할 바에는 제대로 좀 해보자, 그게 꽤 좋은 결과를 낸 것이죠. 열심히 했으니까요.”


- 그래도 게임 음악을 지휘하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진 지휘자가 대표로 있는 ‘플래직’은 글로벌 게임제작사인 ‘블리자드’와 계약 맺고 게임 음악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우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솔직히 클래식계에서 이 활동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돌아온 반응은 좀 의외였어요. 다행스럽다는 반응이 많았거든요. 말인즉슨 클래식 생태계가 좁다는 거죠. 파이 크기는 정해져 있는데 다른 누군가의 활동이 결국 자신의 일을 가져가는 구조에요. 제 경우는 ‘영역 침범’이 아니니 안심한다는 반응이었던 겁니다. 그때 느꼈어요. 우리가 이렇게 일이 없구나!”


- 클래식 음악인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군요.


“일정 이상의 생활능력이 있지 않으면 악기 점검이나 독주 등의 공연 스케줄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평균 이상의 소득이 있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단 겁니다. 그게 어려우면 일을 해도 마이너스 상황을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많이 하는 게 개인 레슨인데, 전 좀 부정적이에요.”


- 왜죠?


“일단 개인 레슨은 위법의 소지가 있고요. 후세대의 돈을 계속 당겨서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어려움을 되풀이하게 될 여지가 커지니까요.”


- 플래직 활동이 ‘실험적인 도전’만은 아니군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단원들의 몸값이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 떨어지고 있어요. 사람은 많은데 일은 없으니까요. 플래직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가 성장할 수 있고, 일을 더 할 수 있도록요.”


- 어떤 게 가장 힘들었고, 지금도 어렵나요?


“인간관계요.”


- 단원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건가요?


“주로 그렇죠. 저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합니다. 전체를 바라봐야만 하기 때문에 그 안의 개별적 관계가 깨지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역할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어요.”


- 모두에게 힘든 시절이지만, 음악인들은 특히 더 그럴 것 같아요.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관객이 찾아오셔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요. 저도 힘들지만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휘란 혼자서는 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나중을 위해 채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 어떤 채널을 말하는 거죠?


“클래식 애호가는 적고 음악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다가 세상과도 단절돼 있어요. 순수예술인으로 클래식 음악인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몰라요. 예술을 묶는 플랫폼을 통해 서로를 묶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이 젊은 지휘자가 걸어왔고 걸어갈 고군분투가 이 글 한 편에 담기기는 어렵다. 예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었지만,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스산한 풍경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진 지휘자의 이야기를 복기하면서 그가 ‘나’ 대신에 ‘우리’에 무게추를 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란 바로 ‘책임’이었다.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지만 관계에 서툴고, 책임의 분배보다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짊어지우는 듯 한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서른 둘, 세상과 예술을 향한 도전과 그만큼의 좌절은 때때로 그를 움츠리게 만들지 모른다. 다만, 그가 놓지 않으려는 지휘자의 끈질김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코로나19가 지나간 후 지휘대 앞에 설 진 지휘자의 지휘봉이 우리에게 건넬 ‘들리지 않는 말’, 거기엔 어떤 메시지가 담기게 될까?            


(사진=진솔 지휘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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