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인터뷰이를 시간을 두고 인터뷰하는 것은 흥미롭다. 대개 시간이 인물에 미치는 영향은 가혹한 경우가 많다. 시간의 가혹함에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게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다. 그에 따라 인물의 발자취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마련. 클래식계의 야심찬 영 지휘자로 주목을 받는 진솔(32) 지휘자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 인근의 브런치 카페에서 진 지휘자를 만났다. 그는 9개월 전 기자와 한차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후 그의 행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불과 인터뷰 이틀 전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게임음악 플랫폼 ‘플래직’의 ‘아이머 게이머’ 공연을 한차례 치룬 터였다.
코로나19 3차 유행의 영향으로 무관중으로 열린 오케스트라 콘서트. 이틀이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공연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리도 흥분케 했는지 궁금했다. 플래직으로부터 현장 사진을 요청해 살펴보자, 그 흥분을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관중을 만나진 못해도
올해만 두 번, 그러니까 공연장에서 한 번, 랜선으로 또 한 번 공연을 봤어요. 왜 진 지휘자님 팬이 많은지 알겠더라고요.(웃음). 공연을 끝낸 느낌이 궁금해요.
“무사히 공연을 치룬 것만도 너무 감사하죠.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연주자 모두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어요. 연습실은 말 그대로 ‘청정구역’이었어요. 행정 직원들은 체온 체크부터 세세하게 신경을 써야 해서 고됐겠지만, 모두 손발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전 저대로 마음을 졸였죠.”
게임 음악을 연주하는 게 클래식 연주자 입장에서는 좀 색달랐을 것 같아요.
“약간 조심스러운 게 있어요. 그저 경음악으로 느껴서 음악과 공연을 가볍게 여기면, 그 모습을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래서 ‘가볍게 여기지 말자’고 누누이 강조를 했어요.”
클래식 전공자들은 아무래도 클래식 연주가 아니라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군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게요.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연주해도 관객들에게 더 익숙한 건 해외 유명 필하모닉의 연주입니다.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요. 그런데 게임 음악은 우리가 만드는 것 자체가 역사가 되니까 진지하게 임해야하는 거죠. 연주자들도 이 점을 크게 공감해서 열정적인 연주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확실히 몰입감이 있더라고요. ‘마음이 웅장해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웃음) 이 점을 염두에 두었던 건가요.
“게임 음악은 어떤 추억을 불러 오게 하는 것 같아요.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통해 듣는 게임 음악에서 느끼는 감동이란, 개인의 추억과 연결되거든요. 이전까지 오케스트라를 잘 몰랐는데 이번 공연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죠.”
여러 인터뷰에서 본인 스스로 ‘게임 마니아’라고 밝혀왔잖아요. 새삼스럽지만 취미가 일이 되어버린 게 즐거운 동시에 스트레스도 있을 것 같아요.
“마니아라 가능하다고 대답하고 싶어요.(웃음) 사실 코로나19 유행에서 매일 연습을 위해 모이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어요. 전 여러 요소를 신경쓰다보니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겠죠. 그럼에도 성장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역시 게임 마니아라 가능하지 않았을까.(웃음)”
그럼에도 랜선 공연이 연주자 입장에서는 생소하긴 했을 것 같은데요.
“약간 어색하긴 했어요. 연주는 항상 관객과 함께 했었으니까요. 관객이 있으면 기침소리 같은 약간의 잡음이 생겨요. 이번에는 실황에서 어떤 잡음도 잡히지 않으니까 연주자도 곡과 곡사이에 긴장을 유지해야 했어요. 곡을 하나 끝낼 때마다. 공연장의 잡음을 전부 통제해야 하니까 신경이 쓰였죠.”
질문을 바꿔보죠. 여러 시도 덕분에 본인의 인지도도 함께 높아진 것을 체감하나요.
“에이… 클래식계에서 저는 아직 어려요. 좋은 시선으로 봐주시는 것 같아요. 다만, 어느 분야나 새로운 시도는 반작용을 가져오기 마련이라, 주변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역할 때문에 항상 앞에 설 수 밖에 없잖아요. 부담이 되진 않나요, 가령 인간관계 같은 것들요.
“항상 어렵지만 이젠 덤덤해졌어요. 원래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죠. 이전까지 클래식 음악계에만 몸담고 있어서 시야가 좁았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앞으로 준비 중인 공연은 뭐죠.
“대구에서 정기연주회 2개가 예정돼 있어요.”
인터뷰를 위해 진 지휘자의 공연 실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자니 게임을 즐기는 동료로부터 “마음이 웅장해지는 느낌”이란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받았다. 마음이 웅장해지는 느낌이 과연 뭘까 궁금해하던 차에 인터뷰 말미 무대 뒤 지휘자 모습이 궁금해졌다. “하루 일과는 뭐예요?” “늦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게임도 하고요!”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의 겉옷에 붙어있던 고양이의 털로 짐작해보건데, 무대 위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의 정체가 사실은 고양이 집사는 아닌지 추측해본다.
진 지휘자에게 내년 계획을 묻자 꾸준히 공연을 하는 것이고 했다. 실제 이달에만 11일과 18일 일주일 간격으로 대구MBC 교향악단 정기연주회 ‘국악과 클래식의 행복한 동행’, ‘진솔과 말러 제5번’을 연다. 해외에서의 공연 제안도 많다. 그래서 진 지휘자는 꼭 농부 같다. 그는 클래식이란 광활한 땅에서 정통과 정통을 변주한 자기만의 음악을 경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