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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Jun 01. 2022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을 읽고

지금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챨스 핸디는 성직자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을 잘 내조하며 섬겼던 엄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겸손과 정직과 성실함 그리고 검소함이 삶에 그대로 묻어있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영국계 아일랜드 인으로 그런 그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로 인해 자신의 국적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릴 때부터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어쩌면 그가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게 되는 것의 시작은 이미 그때부터가 아녔나 싶다.


그가 대학을 졸업 후 Shell에 들어간 것도 어릴 때 너무나도 검소하고 근면한 환경에서 자랐던 찰스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많은 것을 속으로 삼켜야 했기 때문이었음을 그는 책에서 표현하고 있다. 비록 그의 돈에 대한 열망(?)은 그다지 높은 것은 아녔으나, 어쨌든 그것이 그를 셸에 입사하게 했고, 그 당시 셀의 기업 방침인 ‘몰입교육’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좋았던 좋아하지 않았던 챨스에게 많은 경험의 기회를 안겨 주게 된다.


나에게 있어 챨스 핸디는 아주 멀리 높은 곳에 있는 경영석학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그림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내게 참으로 귀한 위로로 다가왔다. 그는 스스로가 ‘관리자’로서의 역할은 맞지 않음을 알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저런 중요한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삶의 그림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은 우연하게도 셸에서 일하는 동안 임원교육 직책을 맡게 되어 그것이 ‘천직’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직책을 떠나야 하는 전근을 해야 하는 제의가 들어오자 사직서를 내고 런던 경영대학원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슬론 재단의 후원금을 받기까지의 1년이란 과정을 미국 MIT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고 등등. 챨스 핸디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경영’에 관심이 많음을 알게 되고 천직이라고 느껴졌던 ‘교육’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어가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내게는 참으로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 마디로, 자신만의 정확한 나침반에 따라 처음부터 확고한 방향 설정을 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어렴풋이’ 느껴졌던 그 무엇인가를 따라가다 보니 Shell의 ‘몰입교육이론’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보니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물론, 평생 그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교수 자리를 선뜻 내놓고 세인트 조지 학장으로 옮기는 찰스 핸디.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를 삶 안에서 실천으로 보여주었음에 그의 용기가 정말 놀라웠고,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쳐야 할 것 같은 감동이었다. 공부를 시켜야 하는 십 대 두 자녀가 있었음에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지닌 것이 아니기에 그의 용기는 더 빛나 보였다. 



엘리자베스와 찰스 핸디



사실 그렇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뒤에는 아내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찰스가 자신의 가치 추구에 흔들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옆에서 지켜주며 성실한 대리인 역을 해주고 용기를 주고 자극이 되어준 엘리자베스가 찰스의 아내였다는 것은 찰스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렇게 성실한 신뢰와 존경을 부어주는 엘리자베스가 없었다면, 찰스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마음껏 발휘해 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의문스럽다. 


그들이 보여준 부부상은 그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부부상으로 내가 원했던 삶이었다. 물론 나의 삶은 끝나지 않았고 하느님이 계획을 바꾸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온 만큼 더 살아갈 것이다.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가능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게 필요한 것은 용기요 지혜고 인내이다. 내가 원하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나는 계속 시도하고 인내하며 부딪혀 가야 할 것이다. 용기를 잃지 않고 지혜롭게.


내가 챨스 저자 조사 부분에 아내 엘리자베스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뒤에 늘 그렇게 든든한 배경처럼 있어주고 솔직한 피드백을 해주고 그의 마인드를 열어주고 그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도와준 엘리자 없는 챨스는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찰스도 엘리자베스를 아내로서, 동료로서, 대리인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의 엄마로서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음을 그의 책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당시 영국에서는 다소 생소하던 ‘경영 교육’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쳤다. 사회철학을 구현하고 싶었던 그의 치열한 열정이 내 것이었음 했다. 암튼.. 그가 여러 중요 경영 대학 설립과 교육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음은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는 <포트폴리오의 인생>과 함께, <코끼리와 벼룩>,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이 책은 꼭 읽고 싶은 책이다. 코끼리와 벼룩과 함께), 그리고 <헝그리 정신>과 <산이 움직여주길 바라는 사람들> 등이 있다.






정체성


그의 첫 찹터 “정말입니까?”라는 제목으로 풀어진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게 했다. 정말 나는 나일까?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나? 또는 펌킨? 과연 나는 그런 이름들이 나의 정체성을 표현해주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어쩌면 대문의 문패가 그렇듯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 나라는 사람의 주소를 보여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졌었다. 그렇게 내가 거쳐간(?) 수많은 얼굴들은 매 순간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지금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와 함께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내 얼굴도 만나게 되고.


조셉 루프트와 해리 잉햄 교수가 고안한 ‘조하리의 창’에서는 우리 모두는 4가지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는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자아. 두 번째는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자아, 세 번째는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자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아는데 남들은 모르는 자아. 이 모든 자아를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자아의 영역으로 넓혀갈 때 우리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메트릭스에 숨어있는 자아들을 만나며 나를 알아가며 진짜 나를 만나는 건지도 모른다. 때때로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될 때의 놀라움, 또는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오는 나의 다른 모습에 의아해하는 나의 모습. 그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반갑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조각들이라는 것. 결국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나의 정체성을 이룬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또한,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허미니아 아이바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행동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라고 주장했다. 일단 행동하고 경험하고 질문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지를 알 수 있다는 것.” (P26)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고 무엇을 좋아하는 싫어하는지, 언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지 언제 열정을 느끼는지 언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지는 우리가 무언가를 시도해보았을 때만이 알 수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일종의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행위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시도하지 않았기에 무기력을 느끼고, 시도하지 않았기에 열정이 사라지고....


어쨌든, 삶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 같다는 찰스 핸디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시도하는 많은 것들 속에 호불호가 가려지고 새로운 열정 속에 목표가 생기고 또는 좌절하는 모든 것 속에 나는 조금씩 나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에우다이모니아 & 받아들임


찰스 핸디는 책 앞부분과 끝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를 우리에게 깊이 설명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삶 속에 에우다이모니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살아야 한다고 그의 특유의 따뜻함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전명’ 또는 ‘가장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함’등으로 번역함이 맞다”는 것이 찰스 핸디의 정의다. 그렇게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며 열정이 살아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바로 이것이 찰스 핸디의 지적이었고 나의 의문이었다.


“혈기 넘치는 선수들에게 경기에서 뛸 날이 서른 이전에 끝난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고, 다른 직업을 위한 재훈련을 받도록 유도하는 일입니다.” 찰스 핸디가 인터뷰한 럭비팀 감독의 이야기다.


이렇듯 삶은 만만찮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가장 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모든 삶이 그렇게 1+2=3처럼 쉽게 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럭비 선수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고 가장 열정을 느끼며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무엇을 발견했지만 그것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삶의 순리인 것이다.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금언이라고 한다. 결국은 그것은 ‘자신을 받아들여라’라는 필연적인 귀결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내가 들여다보는 거울은 어떤 나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는지. 아니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인지를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조건 삶에 순종하며 “나는 고작 이렇게 밖에 살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라며 시도조차 않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은 아니지만, 삶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깊은 삶의 지혜일 것이다.


인제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 있는 나는 찰스 핸디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조금은 알겠다. 삶 속엔 항상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내 꿈을 위해 노력하고 시도하고 추진하고 안 하고 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신비를 느낀다. 지금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안되었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아니고,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해서 희망이 없어졌다며 불평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조심스럽다. 수많은 어려운 나라와 사람들을 떠올리고 보면 어쩌면 삶이 내게 관대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볼 때 그렇다. 내가 끈을 놓지만 않고 있다면 삶은 삶이 원한 그 순간에 나의 염원을 이뤄준다는 것을.


좀 더 젊었을 때는 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는 도전과 시도를 했고, 내 힘으로 벗어났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삶이 내게 허락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음을 알겠다. 삶이 허락했다는 것은 얼마큼 나의 염원이 간절했는지 시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또한 내가 놓아야 할 부분에서 손을 놓았는지 그 모든 것의 복합적인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그렇다면 나의 에우다이모니아는 무엇일까? 전에는 ‘배움’만이었지만, 지금은 ‘일과 배움’이다. 일이 재밌다. 몰입은 몰입을 부르고, 열정은 열정을 낳는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반가운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배움은 내게 있어 공기와 같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배우든 배움을 놓는다는 것은 아마도 나에겐 바로 숨을 놓는 그때가 되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 그 배움이 무엇이 되었든. 배움처럼 나를 들뜨게 하고 열정이 쏟아지게 하고 나를 살아있는 느낌이 들게 하는 무엇은 없다. 적어도 내 삶에 배움이 지속되는 동안은 나도 에우모니아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습(習)’으로 이어지면 더없이 좋겠지만, ‘학(學)’에만 열정을 내는 나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어쩌면 습으로 이어지는 문일지 누가 알겠는가. 





조직과 개인


찰스 핸디도 스티븐 코비와 의견을 같이 한다. 조직이 아니라 결국은 조직을 이루고 있는 개인이라는 것. 그에 깊이 공감한다. 매장의 덩치가 커짐에 따라 더욱 ‘조직’이라는 개체보다는 그 조직을 이루고 있는 직원이라는 ‘개인’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느껴지고 있는 요즘이기에 더욱 그렇다. 내가 그러하다면 기업처럼 큰 조직에선 어떨까? 모든 면에서의 크기와 깊이가 더할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조직의 비전을 직원들이 함께 추구하며 일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비전을 조직의 비전과 연결시켜주면 왜 회사가 그런 목표를 세우고 있으며, 자신들이 그것에 부합된 행동과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시키기가 좀 수월하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렇게 직원 한 명 한 명과 개인 소통을 할 수 있는 만큼의 규모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전문적이고,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매장”으로 키우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새 매장을 설계할 때 내가 알키텍터한테 주문한 컨셉은 ‘따뜻함, 아늑함, 실용적 그리고 전문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손님들이 우리 매장에 들어왔을 때 자기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갖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전문적이고 다양한 제품들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고 느껴주길 원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받는 매장이길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과 함께 우리 매장에서 나갈 때 손님들이 행복한 느낌이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직원들의 밝고 친절한 서비스가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 직원들이 지금도 물론 잘해주고 있지만, 역시 좀 더 교육이 따라줘야 할 부분이다.


찰스 핸디가 보여준 시그모이드 이론은 내게 깊은 공감을 주었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사실 그동안 나는 무척 안일해있었다. 근무 시간도 짧아졌는데, 피곤한 일은 미루거나 넘기거나 했다. 그런 나를 정신번쩍나게 한 것이 바로 새매장으로의 이전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남편과 나는 일을 나눠서 처리했다. 모든 외부 건은 남편이, 모든 내부건은 내가.


너무 감사한 것은 하향곡선을 타고 내려가기 전에 내가 알아서 변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삶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주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열심히 하겠다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는 중이다.






가족


처음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끌었고 눈물 나게 부러웠던 부분은 바로 찰스 핸디와 부인인 엘리자베스와의 관계였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시기가 2009년 4월 27일이었으니, 그 후로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난 4년 동안 우리 가족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편과 나의 관계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우선은 남편을 따라가기만 하던 관계가 이제는 동료관계로 변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많은 부부들이 그렇듯이 우리 역시도 잘 헤쳐 나왔고 여러 번의 관문을 통해 아팠던 만큼의 성숙한 관계로 발전했음은 감사한 부분이다. 그래선지 이번에 읽을 때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부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존경스러운 그녀다. 


그러는 동안 큰 아이는 인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고, 막내는 고3이라고 나름 공부를 한다며 입시 공부 속에 긴장 속에 있는 상황이다.


“명심해라. 너는 평생 사랑할 배우자하고만 결혼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가족 전체와 결혼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처신해야 한다. 너도 알게 되겠지만,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단다.” (P285)


찰스 핸디는 결혼을 마치 타국에 가서 생활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비유를 했다. 그 나라의 역사가 있으며, 그 나라의 풍습을 배워야 하듯 가정 역시도 각각의 역사가 있고 가풍이 있기에 그것을 배워야 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사실 그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한국에선 그래서 ‘사위’를 칭해 ‘백년손님’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며느리 또한 마찬가질 터). 당사자에게나 상대방 가족에게나 영원한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것.


연극을 보러 가는 아빠에게 “제발 뒤에 계세요, 아빠. 저는 아빠가 눈에 띄는 거 싫어요.”라고 말하는 찰스의 아들. 내 딸이 내게 한 이야기도 아닌데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려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만약 우리 딸들이 내게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눈물이 났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성숙한 아빠인 찰스는 다르다. 그 모든 것을 아이들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또한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앞날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응원을 해준다. 걱정이 되고 진로를 바꾸었음 할 때조차도 그는 마음속으로 그러길 바랄 뿐이다.


나도 아이들이 혼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주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한다. 아직 막내는 어리기 때문에 엄마 아빠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지만, 큰 아이는 인제 대학생이므로 혼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다. 내년에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부분이 아마도 지금까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것들 중 가장 큰 사안이 아닐까 싶다.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어쨌든, 가족에 대해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며 배우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깊고도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나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일원이라기 보단 개인적인 주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 개성을 표출하기엔 너무나도 많았던 형제들 속에서 떨어져 나오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지도 모른다.


“서서히 엄청난 진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진정한 자녀교육은 집에서, 부모가 바삐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 다음, 나중에 반대로 할까, 모방할까를 결심한다. 대게 부모는 어느 쪽이 옳다고 딱히 확신하지 못하다. 부모가 항상 아이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이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P299)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닐까. 우리 딸들에게 따라 하고 싶은 엄마, 남편으로 만나고 싶은 아빠. 그런 부모였음하고 바라보는 것. 너무 야무진 꿈일까? 그러기 위해선 내가 아니 우리가 더 잘 살아야 하겠지. 




포트폴리오 인생


‘포트폴리오 인생’을 ‘1인 기업가’ 또는 ‘프리랜서’의 삶으로만 한정을 시켜서 본다면 전에는 부러움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냐면 ‘나’라는 사람을 찬찬히 세밀하게 들여다보았을 때, 강한 자유 억제는 나를 미치게 하지만,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는 나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기조절력이 떨어지는 나'라는 것은 아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다.


결국 나에게는 적당한 자유가 필요하고, 역시 적당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 이러한 ‘적당한 규제’는 나에게 소속감을 안겨주며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예를 들자면, 나는 일을 '죽도록' 하는 것은 싫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싫다. 일을 하면 적당한 여유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물론 여기서의 내가 언급하는 ‘자유’가 ‘일을 안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내가 만약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고 1인 기업가나 프리랜서로서 일을 한다면 과연 나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내가 관리하고 조정하고 계획해야 하는 것. 물론 회사에서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내게는 좀 더 수월하다.                                      


엉뚱한 데서 내향적인 성향이 짙게 나타나는 나를 볼 때 매번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계약을 맺고 논의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는 일일 것이다. 때론 물론 삶에 조미료인 흥분과 열정을 안겨줄 때도 있겠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것이 내 상상 속의 그림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포트폴리오 인생’을 보자면 결국 우리는 모두 포트폴리오 인생을 살고 있다. 일상 속에 우리는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고, 우리는 각각 그에 맞는 책임을 때론 의무적으로, 때론 자유롭게 지며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은퇴 후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나는 ‘은퇴’를 할 생각은 없다. 일하는 시간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평생을 일을 해왔고,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은 내게 성취감과 함께 소속감,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휴가'만' 즐긴다던가, 여행'만' 한다는 것은 내게는 큰 의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간간이 떠나는 휴가가 제맛이고, 기다림 속에 다녀오는 여행이 의미를 느끼게 해주지 않을까. 매일 놀고먹고 여행만 다닌다면 그것은 이미 일상인 것이지 휴가도 여행도 이미 그 상큼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다가 가끔씩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도 좋겠고, 일탈을 꿈꾸는 여행도 좋겠다. 우리는 흔한 것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 짜릿함과 진한 기쁨과 행복은 귀할수록 맛이 진한 것 아니겠나. 나는 그렇게 내 일상을 짜릿함과 매혹적인 것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비록 지금은 오랜만에 나온 해님과 함께 화창한 하늘이 나를 유혹하는 가운데 이렇게 랩탑을 무릎 위에 얹어놓고 리뷰를 쓰고 있는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긴 하지만서도. 


현재의 나의 포트폴리오는 일과 공부로 채워져 있다. 아주 간단한 포트폴리오다. 그 사이사이 다른 일들을 끼워놓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하나하나 늘어나지 않을까?


“지금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중요한 진리를 깨우쳤다.” (214)  


바로 내 마음이다. 지금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다른 것은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나의 에우다이모니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는 것. 진정한 내 자아를 조금씩 발견해가며, 내 모습대로 내 색깔대로 나답게 가는 것.


어쩌면 내가 시도했던 그 모든 것들,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것을 통해 느끼는 행복, 기쁨, 슬픔. 절망 그 모든 것은 어쩌면 내가 나를 알아가기 위해 주어졌던 상이 었고 바쳐야 했던 제물이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도 많은 것을 시도해보고 싶을 것이고, 해보고 싶을 것이고 배우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다른 나를 만나며 놀라기도 하고 의하 해 하고 기뻐하고 부끄러워하기를 반복할까? 인제는 그러한 것들이 힘겹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연륜이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한 것이다. 모든 것에 초연하게 대처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내가 되었으니. 






그냥 한마디...


스티븐 코비야 그렇다 치고 말콤 글래드웰, 톰 피터스 등등을 찰스 핸디의 책에서 만나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놀랬다. 첫 번째 읽을 때는 모르고 지나간 부분들이 지금은 자기를 봐달라며 통통 튀어나오는 모습들이 어찌나 새롭고 재밌는지. 그래선지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재밌게 읽혔던 것 같다. 세 번째 읽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또 그렇게 새롭겠지? 


역시나 따뜻하고 포근한 책이었다. 핸디 할아버지의 성향 그대로 나타나는 부드러운 느낌. 그리고 격하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이어지는 그분의 생각과 진솔한 삶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처음 때처럼 이번에도 핸디 할아버지와 엘리자베스와의 “함께하면서도 지나치게 가깝지 않은” 서로의 공간과 성향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배려해주는 모습은 여전히 내겐 최고의 감동인 부분이었다. 왠지 목소리가 살짝 굵은 듯 허스키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읽었다. 책 표지에서 인자하게 웃고 계시는 핸디 할아버지. 꼭 그 분위기처럼 그렇게 포근하게 읽힌 책이었다.


나도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지적인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삶이 말해주는 거겠지. 잘 살아야지. 아름다운 두 분,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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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7일에 쓴 리뷰를 다시 정리하여 올렸다.

정리하면서 '그때 이렇게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읽었구나'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그 후로 9년이 지났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책 리뷰를 정리하며 올리는 동안 지난 삶이 동영상처럼 그려졌다. 9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의 삶도 달라졌다. 우리 부부는 매장을 접었고, 이 리뷰를 쓸 당시 대학생이고 고등학생이던 딸들은 원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일하고 있다. 큰 아이는 파이낸셜 회사에서, 막내는 건축 디자인 회사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살려 에우다이모니아를 살고 있다.


앞으로 9년 후의 우리의 모습은, 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9년 차로 찍은 Before Sunrise와 Before Midnight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처럼 그런 로맨틱한 그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꿈은 꾸라고 있는 거니까. ^^



- 201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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