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대고문

시도 이후의 기나긴 기다림

by 안나

한 직장에서 근무한 지 2025년 10월 3일부로 딱 12년째가 되었다. 이상하게 올해 상반기부터 더 이상 이곳을 다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감과 결심이 서서 그런지, 새장 같은 회사에 태엽인형처럼 매일 나오기 위해 눈뜨는 것,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평소이상의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기간이 벌써 몇 개월째다.


저번에 말했던 12년 만의 '이직 시도'. 그리고, 한 5개월여간 100곳 가까이 되는 곳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제출하기를 밥 먹듯 반복했다. 새로운 곳을 찾아보고, 이력서를 제출하는 그 반복행동을 해야만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해야 하나.


회사에서 해야 하는 일은 죄다 뒷전으로 몰아내고, 주체할 수 있는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 구직사이트에 화풀이하듯 방문했다. 마우스 스크롤을 수차례 돌리고, 마치 룰렛 게임을 하듯 내 두 눈을 사로잡는 기회가 보이길 바랐고, 그럴 때마다 간곡한 탈출을 희망하며 이직서를 넣기 일쑤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깜깜한 터널 같은 구직활동이 신물 날 때쯤, 한 곳에서 연락이 왔고, 시험도 보았다. 워낙 새로운 형태의 채용방식이다 보니, Chat GPT 등 온갖 신문물을 통해 힌트와 팁을 구걸하고, 머릿속에 장착해서 준비했다. 사람을 채용하는 그 속도와 방식이 매우 빠른 한국에 길들여져다 있다 보니, 수개월을 걸쳐 채용절차를 밟는 이 새로운 형태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절차는 아니니,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답장을 받으면 받는 대로 심장의 호들갑을 가라앉힌 후 내 템포에 맞춰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10월 13일 저녁 7시 40여 분에 걸친 화상면접을 보았다. 4명의 인물이 돌아가면서 12개가 넘는 질문을 하다 보니, 원래 계획했던 타이머 조절 등은 엄두도 못 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제발 '멍청한 소리'만 하지 말 자면서 최대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들의 질문을 이해하고 답하는데 주력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빡센' 면접이었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으려고, 화상면접이 끝난 후 최대한 까먹으려 노력했다. 나름 잘 본 것 같고, 정말 최선을 다해 내가 가진 역량과 나의 스토리를 그들에게 공유하였으니, 남은 것은 그들의 몫일뿐,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걸 알면서도 매일밤 자기 전에 '이 직업에 합격하면 어떤 것부터 처리해야 하나.'부터 오랫동안 벼르고 별렀던 이 지긋지긋한 양반조직과의 이별,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가슴깊이 새길 일침을 날릴까. 이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곤 한다.


마음 한편에 너무나 커져버린 기대감 때문에, 평소에는 찾지도 않는 묵주, 그리고 하느님을 연거푸 찾으면서, 난 정말 잘할 수 있으니 제게 기회를 달라고 그리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처절하게 빌기도 한다. 하루에 12번도 넘게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에 웬만하면 까먹으려고 노력하고, 이 모든 난리부르스적인 내면의 상상 그 끝에는 '안되면 그냥 여기 이곳에 우선 다녀야지. 어떻게 하겠어.'란 체념으로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것들이 내 인생에 있어 '시도'이고 '경험'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니깐 말이다.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김경일 교수가 출연한 '교양이를 부탁해' 유튜브를 보았다. 나는 이 교수님의 강연을 즐겨보는 편이다. 프링글스 같은 동그랗고 푸근한 인상을 가진 50대 귀염상 교수님은 인상 자체가 타고난 심리학자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분이 A를 B라고 우겨도, '오 맞는 거 같아요.'라고 할 것 같다. 나는 인지심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분을 통해 '양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즉, 인문학이지만 상당히 이공계적인 학문이라는 점, 그래서 인간의 심리를 단위로 쪼개고 데이터화한다는 점이 신기했다.


인간이란 자고로 '숫자'라는 직관적인 개념에 잘 속는 그런 동물이라 그런지, 숫자와 과학기반의 데이터를 인용해서 우리의 내면을 설명하는 그 점이 재미있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어쨌든 오늘 본 이 영상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성공의 정의, 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점, 그리고 더 나아가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하는 그 말, "Fear is reaction, courage is decision." 두려움이란 반응이지만 용기란 결심이다. 이 말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워낙 반응하지 않는 인간으로 사회생활을 해왔기에,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는다. 12년의 내공이 쌓인 거라 그럴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자취 생활을 20년 넘게 해서 그런지 완벽하지 않아도 좋은 시작과 끝, 그리고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온 것 같은데, 그 이후의 방향은 잘 모른 채 우울감에 빠져 살아왔다. 그래서, 김 교수님의 강연과 저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두려워도 무서워도 그 반응은 잘 숨길 수 있으니, 이제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변화를 주는 그 방향을 택하자는 그 결심을 내린 것이다.


나는 모든 시도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다. 결과라는 것은 결국 나의 시도를 본 상대방이 하는 것이지만, 모든 선택과 과정에 있어 결심은 온전히 내 몫이니 말이다.


이제 그러한 결심이 섰으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습관처럼 '기대고문'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대신 결과에 대해서는 그게 어떻든 덤덤하게 받아들이자 그렇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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