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미혼부 연예인과 결혼했다 22

우리들의 마흔

by 장정윤

나는 곧 마흔이 된다. 10월 생이라 해가 바뀌어도 만으로는 38살이지만, 한국도 곧 만 나이를 도입한다고 하지만... 이런 이유로 한두 살 낮추어 무엇하리. 나는 빼박 몇 달 있으면 마흔이 되는 것이다.


막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가 대학교 4학년 23살이었다. 난 등록금 비싸기로 소문난 서울의 한 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하고 있었다. 동기 중엔 중고등학교 때 난다 긴다 하는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을 한 친구들도 많았고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좋은 대학을 다니다 편입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사실 문예창작과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수능 점수가 목표한 만큼 나오지 않았지만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답답해하다가 네가 평소 쓴 편지를 받아보면 글을 잘 쓰는 거 같으니 예대 문예창작과를 지원해보자 해서 두 달 벼락 과외를 하고 턱걸이로 대학에 들어간 터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두 달 공부하고 들어갔으니 재능이 남다르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엔 그런 생각은 잘 못했고 항상 그들 사이에서 주눅만 들어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소설가는 못되겠다 생각한 나는 졸업도 전에 호다닥 방송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난 겨울방학에 방송작가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아카데미가 끝나기도 전에 한 방송국에 들어가 80만 원, 세금 떼면 77만 원 정도를 받으며 막내작가로 사회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름 재미가 있었다. 다들 프로였고 그 속에 속해있으면 나도 프로가 된듯했다. 연예인을 자주 볼 수 있고 또 그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가는 것도 특별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땐 연예인과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지). 대본을 쓰고 자막을 쓰는 일은 처음엔 잘 못했지만 하다 보니 늘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아서 혼난 적도 있다. 당돌하다나...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옮겨 다니며 꾸준히 일했다. 그 과정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상처도 많이 입었다. 선배 작가들 때문에 두 번, 피디 때문에 한 번 좌절했었다. 나는 그때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피하는 쪽을 택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래서 나한테 더 미안했다. 왜 그때 더 당당하게 목소리 내지 못했을까?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역시 나는 피하는 쪽을 택했을 거다. 마흔쯤 되어보니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피하는 게 상책이더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난 역시 쫄보라 피하는 편이 스스로 편하다.


동경할만한 작가 선배들도 많았다. 능력이 뛰어나 프로그램을 2~3개씩 하면서도 후배들까지 잘 챙기는 그런 선배들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생각했다. 물론 그 선배들이 사는 집, 차, 가지고 다니는 가방 등도 부러웠다. 꼭 저렇게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까진 도달하고 싶었다. 미래를 걱정하는 후배들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올 때 나는 버티는 게 답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로선 곧 마흔이고 더 치고 올라가야 하는 타이밍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작년 겨울 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완전 무기력해졌다. 지금까지 거진 8개월 정도 백수생활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건 자의로 이루어진 일이다.


완전히 지쳐있었던 것 같다. 사실상 16년 동안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방송작가는 대부분 프리랜서다. 누군가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만큼 팀 구성이 빡빡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휴가란 사치와 가까웠고 휴가를 간다 해도 휴대폰은 항상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휴가를 맛보고 싶다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실제로 그렇게 그만두고 몇 달이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작가들이 있었는데 난 진심 그 용기가 부러웠다. 나는 잘 그만두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정말 쉬어야 한다 생각할 때 용기를 내서 그만두고도 2주만 지나면 몸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바로 일을 찾아 나를 노동의 현장으로 보내야만 했다. 성격이 팔자라고 하던데... 놀 팔자는 아닌 것이다. 일을 해야만 안심이 되는 성격이었다. 작가들끼리 돌아가면서 가는 휴가도 기꺼이 포기하곤 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에도 대본을 쓰며 신혼여행을 미뤘는데 코로나19가 터지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다. 스스로 느끼기에 마음이 곯은 것을 알게 됐다. 하루 종일 노트북만 쳐다보고 사람들에게 시달린 날, 강변북로로 빠지는 일방통행 다리에서 곧 떨어질 거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퇴근 한 날은 꼭 술을 마셔야 화가 사라지고 잠이 들 수가 있었다. 가끔은 꿈속에서도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종종 무기력해졌다. 불면증으로 며칠 동안 잠들지 못했을 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란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난 대외적으로 밝고 건강한 사람이기에 아무에게도 티 내지 않았다. 그저 좀 쉬고만 싶었다. 제발... 쉬고 싶었다.


나보다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내가 나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예민하고 나약한 주제에 그렇지 않은 척을 잘도 하며 산 거 같다. 어쨌든 작년 겨울, 내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프로그램에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 작가팀은 의견이 맞지 않아 다 같이 나오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녹화를 한 후 후반 작업을 거쳐 방송에 나가기까지 2~3주가 걸리는데 그 2~3주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됐다.


일하지 않는 나는 스스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고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쉬면 책이나 쌓아두고 실컷 읽어야지 싶었는데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남의 인스타그램이나 들여다보며 좋아요를 눌렀다. 이쯤 되면 좀 쉬어도 되잖아?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일을 그만뒀다는 소식에 여기저기 프로그램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또 선뜻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려고요... 핑계를 대면서 피했다.


그렇다고 마냥 허송세월로 살 순 없는 일이었다. 승현과 종종 동네를 산책할 때 마포 FM 간판을 본 적 있다. 뭐하는 곳일까 그냥 마음속으로만 궁금해했다. 어느 날, 대학 동기 중 1인 출판사를 하는 미선이라는 친구의 상암동 사무실을 구경 갔다가 같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이 우울하고 힘들다고 말하자 미선은 재밌는 일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다가 내가 마포 FM이라는 곳이 있더란 말에 미선은 거기 국장님을 알고 있다며 바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기획안을 써서 내고 마포 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되었다. DJ가 된 것이다. 미선, 그녀의 추진력이란... 마포 FM은 따로 엔지니어가 없어 기계 다루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돈도 따로 주지 않는다. 우리 프로그램의 제목은 <우리들의 마흔>. 미선은 나보다 한 살 많아 이미 마흔이고 난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미선도 둘째를 낳고는 다니던 대형 출판사를 그만두고 1인 출판사를 내 새 출발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이 쉼을 계기로 내내 가슴에 간직했던 꿈을 실현시켜 보고 싶었다. 마흔이란 나이가 우리에게 그랬다. 불안감에 잡고 있는 작은 것들도 놓지 못했던 20대를 지나, 경주마처럼 열심히 달려야 했던 30대를 지나 마침내 만난 마흔.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엔 늦은 시기이고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엔 적당한 나이. 우리는 후자를 염두에 두고 매회 마흔과 관련된 주제를 두고 방송을 했다.


처음에는 엉망이었다. 주제가 '마흔인 여자들의 사회생활'이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 대하는 것도 사회생활처럼 하면 된다더라고요~ 한마디로 시작해 내내 시댁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우리는 재밌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마포 FM 방송으로 나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주위 친구들이 듣고 재밌다 말해주었다. 마흔이란 나이에 맞춰 이런 주제 저런 주제를 얘기하다 보니 생각의 정리도 되었다. 그러다가 예고 선생님을 하다가 때려치운 대학 선배 승훈도 <우리들의 마흔>에 합류하였다. 셋 다 거의 백수나 다름없지만 꿈을 향해 가고 있으니 마냥 백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춤하기보단 우리는 되든 안되든 나아가기로 했다.


나는 또 용기를 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5월부터 연재했는데 현재 독자 수가 3000명이 넘는다. 어떤 글들은 조회수가 10만 회가 넘는다. 너무 감사하고 멋진 일이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제안들이 들어온다. 에세이 작가가 꿈은 아니지만 이에 자신감을 얻고 발을 뻗어 볼 용기가 생긴다. 앞서 말했지만 되지 않아도 괜찮다. 되면 더 좋고.


어느 날 승현은 스스로 백수라고 말하는 나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 장 작가가 왜 백수야? 라디오도 하고 글도 쓰잖아!

- 돈을 못 버니까 백수지…

-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그게 다 돈이 되는 날이 있어. 그리고 돈이 안되면 어때. 내가 버는데. 그냥 장 작가 스타일로 계속해.


승현의 말이 맞다. 내 꿈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남편을 만나서 다행이다. 그의 응원은 나의 16년 동안의 애씀을 인정받는 느낌이다. 생각했던 것만큼 완벽한 마흔은 아니지만 꿈꾸는 지금도 좋다.


당신의 마흔은 어떠길 바라는가? 또 당신의 마흔은 어땠는가? 멈추었는가? 나아갔는가?


승현이 그린 그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번외 <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