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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l 20. 2016

순수

세상의 모든 단어는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사랑이 몸이 아닌 말이었을 때

꿈이 부대낌이 아닌 관념이었을 때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청정함.


단어가 그냥 어떤 것을 가리키기로 한 약속일 뿐이란 걸.

그래서 둘이 만나 같은 단어로 다른 그림을 이야기한다는 걸.

같은 체로 뜬 물고기가 비늘 모양도,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꼬리 모양도 모두 다른

부르는 이름만 같은 물고기였다는 걸 알기 전까지


나의 세상은 견고하고 순수한 말놀이판이었다.

나의 단어들은 정결한 신들의 숨결.

퇴색되지 않는 형상들의 사원.


그러나 세월은

청정함 속에

빛나던 단어들을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끝끝내 되살려온 피묻은 무기로 만들었다.

아니,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귀환했다.

너와 나의 몸에서 흘러나와

강을 이룬 피,

무수한 천사들의  꺽인 날개와

아름다운 흰 말들의 죽음,

그 모든 것을 목격한 눈은

그 영혼은 이제

수만 개의 열람 카드를

찾을 때 어떤 냄새를 떠올리게 되었다.

로고스의 종이 냄새 대신

끈적이는 피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신전에서 거리로 나온 나의 언어들,

비루해진 만큼

수많은 무용담과

만날 수 있다.

만난다는 건 변질된다는 것.

그러하다.

정연한 질서가 아닌

법칙없는 법칙의

도가 세상.

영원불멸의 성은 사라졌으나

형상들은 살아움직일 것이라고.


순수함은 천사의 승천과 함께

이곳에서 저 별나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말이 아닌

피로,

형상이 아닌

땀냄새로,

눈길에서 손길로

제 길을 내어준

순수,

물이 땀이 되는

대사를 통해

제 몸을 복원한다.


신은

시에서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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