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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Apr 02. 2018

너무 뜨거워 놓친 마음과,
그 잿더미 위를 걷는 일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떠오른 순간들    


call me by your name


첫사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순간들. 봄날 공원 잔디밭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고 그가 팔베개를 해주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던 흙냄새와 그의 땀 냄새가 섞인 공기를 맡으며 바이킹을 탈 때처럼 배가 싸르르하던 한 낮. 


2층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던 저녁도 기억난다. 그가 손깍지를 끼었고, 잠시 머뭇거리다 키스해오던 시간. 집 근처에서 헤어지기 싫어 빙빙 돌던 중 그가 나를 안아서 번쩍 들어 올리던 가을밤.  


온 우주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던 순간이 있었다. 그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내가 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이가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싶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고 그의 말투를 따라 했다. 


행복이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 끝을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쥐고 있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하던 목소리가 전화기로 들려오던 때의 절망감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은 뜨거웠던 첫사랑과 환희, 그리고 그 특별한 순간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 마음에 새겨지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1983년, 여름휴가를 맞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의 가족은 이탈리아의 가족별장에 머문다. 조숙한 17살 소년 엘리오는 교수인 아버지 일을 도우러 온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를 만나게 되고, 그를 향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첫사랑이 대개 그렇듯 엘리오는 온 신경이 그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눈빛을 숨겨보려고도 했지만 이내 고백하고 만다. 그때는 대책 없이 투명하고 강렬해서 금세 들켜버리니까.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여름 한 때처럼 지나가는 청춘과 젊은 육체에 대한 찬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카메라는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살과 자연,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크레타 마을의 풍경, 여름날의 나무와 과일, 물기 있는 청년들의 몸을 갈망하듯 훑는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열렬히 사랑한다. 왜 더 빨리 알아보지 못했는지 아쉬워하면서. 큰 사이즈 옷을 싫어하던 엘리오는 올리버가 입던 헐렁한 셔츠를 입고 기뻐서 뛰어간다. 함께 산책하고 수영하고, 껴안고 숨이 찰 때까지 춤춘다.


그러는 동안 여름은 빠르게 지나간다. 엘리오가 코피를 흘리고, 함께 있던 밤에 구토하는 건 다가올 이별을 예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마지막 20분에 함축되어 있다. 미국으로 떠나는 올리버를 배웅하고 돌아온 날, 엘리오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서로를 알아본 건 행운이었다고. 지금은 슬프고 아프겠지만 그게 두려워 억누르려고만 하면 영혼이 닳아 없어져버린다고. 그러면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이 없어진다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평생 한 번씩의 순간만 있는 것이니 지금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call me by your name


반년 후, 올리버는 전화를 걸어와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통화가 끝나고 엘리오는 벽난로 앞에서 조용히 운다. 그는 무언가를 다짐하면서도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기억해두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불꽃이 사그라들면 잿더미가 남듯, 사랑이 끝나면 마음에 커다란 흔적이 남는다. 그 자국은 시간이 켜켜이 덮여 보이지 않다가도 종종 바람이 불면 형체를 드러내 놀라게 한다. 


아름답고 강렬한 영화의 엔딩은 나 또한 엘리오처럼 너무 절절해 실패했던 한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여운은 자꾸 묻는 것 같다. 


네게는 또 어떤 마음의 폐허가 남아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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