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 누에 속에 감춰진 너를 못 봐 나는 알아 내겐 보여
그토록 찬란한 너의 날개 겁내지마 할 수 있어
뜨겁게 꿈틀거리는 날개를 펴 날아올라 세상 위로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버터플라이’- 러브홀릭스 ]
2018년 1월 16일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온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불꽃놀이는 처음이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축하행사가 클로징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그 날 행사의 사회자였다. 감동적인 불꽃놀이가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배경음악으로 영화 <국가대표>의 주제곡‘버터플라이’가 흘러나오자 나는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참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그간의 힘들고 길었던 내 시간들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 말해주지 않았던 시간들. 나 자신조차 의심으로 가득했던 그래서 고통이라 이름 지었던 시간들을.
스물네 살, 대학졸업과 동시에 나는 고향인 포항에서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딱 5년을 채우고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고 곧 임신과 출산으로 엄마의 삶은 시작됐다. 일을 그만두면서 나는 평생 전업주부로 살겠다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내 일을 하겠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흔한 진리를 곧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세 돌이 되면 가족이 함께 유학을 가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새로운 일을 하겠다던 계획은 완벽히 틀어졌다. 대신 나는 포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분명 힘들지만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성취 또한 간절히 원했다. 문득문득 내가 잉여인간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린 딸은 엄마가 아나운서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엄마가 실제 아나운서인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엄마는 회사에 가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아이의 말에 충격을 받아 아이에게 그렇지 않다고, 엄마라고 다 회사에 가지 않는 게 아니라고 당황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꼭 다시 일 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내 딸이 그런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내가 일을 다시 할 수 있긴 한 걸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미 일을 한 시간보다 전업주부로만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진 때였다.
친구들은 내게 교육대학원을 가서 기간제 교사를 하거나 약학전문대학원을 가라고 조언했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내가 하던 일, 방송을 다시 하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방송을 다시 한다는 게 그렇게 당연하도록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교육대학원이나 약학전문대학원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냈다. 대학 때도 교육학을 이수하다 포기한 전력이 있고, 나는 학창시절 화학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다만 다시 방송을 하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는 나만이 들을 수 있게 늘 조심했다. 사람들이 듣는다면 비웃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현실이 그랬다. 방송계는 들어오기도 힘든 곳이지만 치열한 경쟁으로 계속 일해 나가는 것도 힘들다. 한 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는 더더욱 힘든 곳이다. 특히나 나처럼 긴 공백을 딛고 다시 일하게 된 경우는 좀처럼 찾을 수 가 없었다. 나와 같은 경우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감히 꿈꾸지 않는 편이 현명한 판단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할수록 내 바람은 점점 더 간절해져갔다. 그래서 결심했다. 일단 해보기로. 도전해보고 안되면 그때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그 결심을 했을 때 나는 서른일곱이었고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남들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둔다는데, 나는 아무도 보장해준 적 없는 무모한 도전을 덜컥 시작하기로 했다. 막상 결심은 했지만 이력서를 내도 연락을 주는 곳이 없었다. 어쩌다 면접의 기회가 생겨도 차가운 무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날이 그렇게도 많았다.
그런데도 포기가 안됐다. 내가 자기 객관화가 안 된 나머지 헛발질 중 인걸까 매일 물음을 던졌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당장 방송에 출연할 수 있을 정도의 풀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하고 최선을 다해 옷을 골라 입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학교에 가고나면 신문을 읽고 신간 베스트셀러 서적을 읽었다. 방송의 감을 찾기 위해 방송을 처음 준비할 때처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각종 방송을 섭렵하며 모니터링하고 녹화하고 녹음해 멘트를 받아 적어 연습 원고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수 백 번을 넘게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언제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니 모든 장르를 연습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씩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런 애를 쓰고 있는걸까 하는 허탈함은 정말로 아프고 무기력했다. 일단 도전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겠다던 처음의 쿨했던 결심은 점점 미련으로 변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것이 아까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 세상 앞에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또 결심했다.
영원히 아무 희망도 생기지 않을 것만 같던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피디님께 연락이 왔다. TV캠페인에 출연할 엄마와 딸을 찾고 있는데 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멘트는 없고 딸과 함께 모델로만 출연을 하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어쨌든 방송에 다시 나올 기회가 하나 생겼다. 그 캠페인은 외주 제작사에서 담당을 하고 있었고 감독님과는 초면이었다. 촬영 구성안을 보니 내레이션이 포함돼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내가 그동안 고독하게 연습해온 시간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감독님께 그 내레이션을 녹음할 사람이 정해져있지 않다면 내가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대답이 없으셨다. 침묵 속에 어이없어하는 그의 표정이 읽혔다. 나는 그 내레이션부분을 녹음해 다시 감독님께 보냈다. 그제서야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드셨는지 그렇게 하자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때의 뻔뻔한 용기는 몇 달 후 정규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작은 역할이지만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짧은 녹음이 전부였는데 그 프로그램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공부해가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방송을 다시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1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1년은 참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었다. 정확하게 3년이 걸렸다. 일단 해보기로 결심했던 날로부터 TV에 다시 복귀하기까지. 나는 마흔이 되었다. 11년만의 TV복귀였다. 선배님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15분 정도 출연하는 보조 진행자리였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극적인 방송 복귀 두 달 후 나를 냉대했던 다른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나는 오랜 꿈이었던 라디오 팝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게 되었다. 그때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온 나라가 들썩이던 때였다. 그런데 전국을 순회하는 올림픽 성화봉송 행사에 내가 사회자로 추천을 받게 되었다. 2018년 1월 1일, 나는 그리스에서 포항까지 모두를 비추기 위해 달려온 올림픽 성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앞이 보이지 않아 새해 해돋이를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다. 올림픽 행사인 만큼 영어 진행을 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영어 진행은 처음이라 걱정이 됐지만 어떻게 해서든 해내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밤을 새워 영어 대본을 전부 외우고 행사현장으로 갔다.
국가적 행사에 민폐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진행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니 스태프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으로 내 걱정을 씻어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연락이 왔다. 2주 후 서울에서의 성화봉송 행사도 진행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서울행사는 전체 성화봉송 행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라는 말도 덧붙였다. 믿기 어려울 만큼 감격스러웠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정말 덥석 해도 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지만 나는 감사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있었던 서울행사의 불꽃놀이는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축하 이벤트인것만 같았다. 러브홀릭스의‘버터플라이’에 맞춰 펼쳐진 불꽃놀이와 함께 그 영광의 순간을 나는 오래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눈물을 겨우 참으며 클로징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길었던 행사를 끝까지 함께해준 관객들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여러분, 너무 멋지죠? 마지막까지 기다리길 참 잘했다 싶으시죠?”관객들은 진심을 다해“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사실 그 멘트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참고 기다리고 오길 정말 잘했다. 만약 포기했다면 이 감동적인 불꽃놀이도 보지 못 했을테니까.
그 이후 감사하게도 나는 많은 기회들을 얻게 되었다. 보조진행을 하던 프로그램에서는 선배님의 뒤를 이어 메인진행자가 되었고 시사프로그램과 라디오프로그램의 진행자로도 제안을 받았다. 평창올림픽에 이어 평창패럴림픽의 성화봉송 행사에도 전일정의 사회자로 제안을 받았다.
이렇게 내가 내 커리어를 만들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아이는 어떻게 키웠을까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소리 내어 방송멘트 연습을 했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이상 학원에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이런 나를 두고 특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내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창의적이었던 이야기는“혹시 계모세요?”였다. 물론 그 분은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어떤 뜻인지는 금방 간파할 수 있었다. “엄마는 항상 옷 사고 화장품사고 꾸미고 다니면서 아이 학원 보내는 비용은 아까운가요?” 였다.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는 아이를 방치한 것이 아니라는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곧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열심히 방송연습을 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는 놀이에서도 내 모습을 따라했다.“안녕하세요! 김주원의 한밤의 라디오~”라며 방송 타이틀까지 지어가며 진행을 하는 흉내를 내고 내가 책을 읽을 때는 자기 책을 갖고 와 옆에서 같이 읽었다. 물론 항상 잘해주지 못하는 부족한 엄마의 마음은 무겁고 미안했지만, 내가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교육이라는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사랑하지만, 내가 아이의 삶을 살아줄 수 없고 아이 역시 내 인생을 보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으려 한다.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아이와 나눴던 잊을 수 없는 대화가 있다.
“주원아, 행복해?”
“응!”
“왜?”
“내가 주원이라서!”
“네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주원이여서 행복해?”
“응!! 그리고 엄마가 있어서. 엄마는 착한 엄마니까.”
부족한 엄마가 듣고 싶은 얘기를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해주는 딸이라니. 고마울 뿐이다. 그래. 우리 그렇게 살아. 너는 너여서, 나는 나여서 행복하게. 엄마와 딸이 눈물의 관계가 아닌, 각자의 삶을 기꺼이 기쁘게 가꾸어나가며 행복하게 응원하는 관계이기를. 올해 중학생이 된 딸이 어버이날 정성으로 눌러쓴 깜짝 편지를 전해주었다. 엄마는 멋진 사람이고, 엄마가 롤모델이란다. 정말이지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 나는 여전히 내 일을 해나가기 위해 지금까지 못지않은 분투를 해야 하겠고, 내 딸도 삶의 고난들을 배워갈 것이다. 우리 앞에 반갑지 않은 사건들이 펼쳐져 힘들어지기도 하겠고 내 딸이 나에게 실망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믿어주며 걷고 또 걸어 나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