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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자유


영화 「카모메 식당」은 사치에라는 일본인 여성이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골목에 작은 일식당을 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커피와 빵도 팔지만, 이 식당의 주메뉴는 일본식 주먹밥. 굳이 연고도 없는 먼 나라까지 와서 파는 음식이 기껏 주먹밥이라니. 지나치게 소소하다.



영화 <카모메 식당> 스틸 이미지



그래서일까. 카모메 식당은 문을 연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손님 한 명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주인장에게선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녀는 손님 없는 식당에 나가 그릇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수영과 합기도를 하며 하루 일과를 보낸다. 텅 빈 가게 안을 창문 너머로 흘끔거리며 비웃고 지나가는 할머니들에게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 어렵사리 마주한 첫 손님에겐 손님 1호라는 이유로 영원히 공짜 커피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영화 <카모메 식당> 스틸 이미지



영화를 이쯤 보고 나니 내 속이 부글부글거렸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 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뭐가 됐든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냐.


적극적으로 현지인들이 좋아할만한 메뉴 개발도 하고, 맛있으니 먹으러 오라고 가게 홍보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나? 저 가게 월세는 얼마일까? 저렇게 파리만 날리는데 곧 망하지 않을까? 먹고살 돈이 충분해서 다른 나라까지 와서 취미로 가게를 연 건가? 이유가 무엇이든, 아마 나라면 손님이 오지 않는 가게에서 그녀처럼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중에 식당 일을 돕게 된 미도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했는지, 여행객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가이드북에 가게를 소개하자고 제안하지만 사치에는 말한다. “가이드북을 뒤져서 찾아오는 일본인이나, 일식 하면 일본 술과 초밥밖에 모르는 외국인은 우리 가게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요. 여긴 레스토랑이 아니라 동네 식당이에요. 근처를 지나다가 가볍게 들리는 곳이죠.” 물러 터진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식당 운영 철학은 단호하고 분명했다.


다음의 대사를 들으니 더 확실해졌다.


"원하는 일을 하니 참 좋겠군요."

"아뇨,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원하는 일을 하는 것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얼핏 같은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둘은 분명 다르다.


나만 해도 용기 내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지만, 싫어하는 일도 억지로 끌어안고 살아왔다.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며 내게 맡겨진 역할이나 챙겨야 할 사람들, 사회적 체면도 있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책임과 의무는 점점 무게를 더한다. 그래서 원하는 일을 하기도 쉽지 않지만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건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싫어하는 일을 멈추는 건 타인의 시선과 타인을 향한 배려에서 자유로워지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돌연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제주도 여행 중 머물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호스트와 나눴던 이야기. “어떻게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도에 내려와 살 생각을 하셨어요?”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직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하기 싫은 일부터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는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 이리저리 치이고 상처받았지만 참고 견디기만 하다가 몸과 마음이 무너진 상태였다고 했다. 목표니 미래니 하는 것들은 생각하기도 싫고 솔직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려왔다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기 싫은 일을 멈추고 그냥 충실히 하루를 살다 보니 그제서야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 같은 노력중독자들은 눈앞에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노력할 대상이 없으면 지루해 견디질 못한다. 아니 어쩌면 지루한 게 아니라 불안한 건지도 모른다. 노력을 멈추면 늘 제자리걸음일 것 같아 뭐든 열심히 한다. 그런데 체력이 바닥났을 때쯤 얼마나 멀리 왔나 뒤돌아보면 제자리 뛰기였다는 걸 알아채는 때가 적지 않다. 내가 나로 서려면 무엇에 힘을 쏟아야 하는지 모른 채, 여기저기 힘을 낭비하기만 했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호스트 역시 그랬고, “일단 멈춤!”을 외쳤다.





싫어하는 걸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것만이라도 그만둬 보면 어떨까.


한때 나는 분명한 취향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많은 것을 해 보았지만, 단호하게 “바로 이거야” 하고 무릎을 탁 칠만한 경험은 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는 일을 그만뒀다. ‘싫은 것’을 하나씩 제외해 나가니 ‘좋은 것’이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을 고를 땐 모호하더니 ‘싫어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적극적으로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확실한 방법은

싫어하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다.


싫은 것은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하는 게 아니라, 용기 내 서서히 멀리 해야 할 대상이다. 하기 싫은 일에 낭비하는 에너지를 아껴 나에게 집중해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자.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처럼 불안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삶을 끌어가는 단단한 사람으로 살자.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다음 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2화. 적당히, 비굴하지 않게 나를 지키며 살고 싶다.

11/10(토) 오전에 연재됩니다 :) 



이 글에 소개된 책


매거진의 이전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연재를 시작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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