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이번에는 술술 읽힌다. <소년이 온다>와 확실히 다르다.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간의 갈등이 드러나 있어 더욱 몰입하게 한다.
비유나 감각적인 문장이 적어 더욱 쉽게 읽힌다.
그런데 내가 다름아닌 어제 그리고 오늘, 이 소설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끌고, 중재하는 더욱 큰 손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조화로운 삶>을 읽고,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읽고, 황성수 박사의 현미자연식을 만나 오늘 처음으로 현미를 날것으로 먹어보았다.
<채식주의자>를 하필이면 오늘 읽고 있다니.
나의 신념과 철학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주려는 운명의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오후 4시에는 교촌치킨이 간식으로 나았다.
수많은 치킨 브랜드 중에서도 나는 교촌치킨을 뛰어난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교촌이라는 글자를 보고도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영혜'가 폭력에 대해 급작스러우면서도 강력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듯, 나 또한 인간을 위해 아니 인간의 말초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육되고, 배달된 저 생명체에 대해 강한 연민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입 안에 침이 고여오는 것을 느끼며, 도대체 사전에 입력된 나의 폭력성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심각한 회의에 몸을 떨었다. 아... 나는 왜 저것을 거부하면서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가.
역겨웠다.
주어진 것이므로 적당히 한 입 정도 먹어볼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욕망의 고속열차를 멈춰세운 것은 뜻밖에도 서무주임님이었다.
모든 직원들이 게걸스럽게 닭고기를 물어뜯으며 탐욕스러운 모임을 갖는 동안, 서무주임님은 사무실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한두마디씩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이번에도 평소와 같이 말을 주고받다가, 나 자신이 닭고기에 대해 전혀 미련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황홀했던 맛에 대한 미련 또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약간의 편법을 통해, 나는 그 맛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편법조차 하찮게 느껴졌다.
'채식을 실천해야지' 따위의 다짐이 아니었다.
'고기를 참아야지'따위의 금욕주의 역시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이 방식이 좋았다.
이 방식을 소중히 여기고, 아껴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는 내 자신이 대견하고도 자랑스러웠다.
육식의 반대는 채식, 비건이 아니다.
자연식물식이다.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폭력에 대항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