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작은 것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세태를 말한다. 언뜻보면 좋아보이는 의미같지만 황상민 심리학 박사는 어차피 꿈꾸지 못할 큰 목표나 큰 만족감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나는 체념적 행동의식(정확한 워딩은 아니고 기억하는대로 쓴 것임)이라고 했다. 그 해석을 듣고나니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갑자기 현타가 왔다. 소확행이 중요하지만 소확행만으로는 살 수 없다!! 하지만 곧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고 일상에서 마음껏 누렸던 사소한 것들이 차단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이전의 삶을 회복해가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마스크없이는 외출이 어렵고 실내에서는 무조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며 번화가 건물에서는 임대라는 글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생존이 위협당해서일까? 소확행마저 쉽지 않은 삶 속에서 사람들은 대불행으로 노선을 바꾼 듯 보인다. 크지만 불확실한 행복. 모두가 행복하긴 어려워도 복불복으로 내가 큰 행복을 거머쥘 수 있는 코인과 주식은 마치 코로나 시대의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코인과 주식을 안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조금이라도 금전적 여유(여유랑 상관없는 걸까)가 있다면 주식을 할 수 있는 어플을 깔고 지인들과 정보를 나누었다. 부동산부터 주식과 코인까지. 투자와 투기의 애매모호한 경계선에서 승자들만 있고 패자는 없어 보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주식과 코인 광풍은 조금 잠잠(이런 거 보면 미디어라는 큰 손에 의해 사람들이 조종당한 것처럼 보이기도;;)해진 듯 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큰 수익을 만졌을까? 아니면 약간의 손해를 입었을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대신 불확실해도 큰 행복을 좇았던 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꾸안꾸 이야기하려다 너무 돌아왔다. 꾸안꾸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이라는 패션 용어이다. 멋쟁이들은 2가지로 나뉜다. 아예 뽝!하고 힘 준 멋쟁이들과 평범해 보이지만 나도 한 번 저렇게 입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입은 멋쟁이들. 전자는 내가 감히 시도할 수 없고 시도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후자는 잘 하면 저렇게 입는 게 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꾸민듯 안 꾸민 듯은 일반인들이 시도해볼만한 멋쟁이들의 룩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비슷한 계열로는 '심플한 듯 멋스럽게' '자연스러운 세련미' 등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꾸안꾸는 이제 과거의 용어가 되어 버렸다. 꾸밀래도 꾸밀 수가 없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마스크를 벗을 일이 잘 없고 화장을 해도 마스크로 인해 망가지기 쉽상이다. 꾸민 듯 안 꾸민 듯이 아니라, 꾸밀래야 못 꾸미는 꾸못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차피 화장을 잘 하지 않았던 일부(나 포함)는 그래서 더 편해졌다고 느끼지만 원없이 화장 안하고(읭?) 살다보니 화장이 아주 쬐금 그리워지기는 하더라.
서서히 패션 업계에 활기가 돌고 굳어 있던 쇼핑 심리는 탈마스크 시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다양한 쇼핑 어플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벌이는 할인 전쟁 또한 한 몫하고 있다. 그 동안 죽어있던(최근에 점점 살아나는 듯?) 오프라인 매장의 활로를 온라인 쇼핑몰로 바꿔 다양한 할인 혜택과 무료 반품을 제시하며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의 브랜드 옷은 백화점이나 아울렛에서만 볼 수 있었다. 온라인에서는 자사 홈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것도 판매되는 유통구조가 아닌, 룩북 형태로.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양한 쇼핑 플랫폼에서 기업 브랜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유통하는 시스템이 마련되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는 좀 더 편하게 모바일 화면에서 내가 원하는 브랜드의 옷을 검색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과 언택트에 익숙해진 소비자 선점에 나선 패션 기업과 유통사들, 누가 땅따먹기에 제일 성공할 것인가?
꾸안꾸의 시대에서 꾸못꾸의 시대를 거쳐 다음은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 나는 꾸확꾸의 시대가 올 거라 생각한다. 꾸밀려면 확실히 꾸며라! 하지만 그 이전의 꾸밈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소확행도 그렇고 대불행도 그렇고 결국에는 불안의 잠재우기 위해 생겨난 사회적 흐름이다. 소확행은 불안을 작은 것에서 만족을 찾으면서 해소하려 했고 대불행은 한 방을 노리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덜 불안하고 더 불안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 코로나 이전부터 불안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내년에도 각자의 불안을 어떻게 다스리냐가 행복이라는 키워드와 붙지 않을까. 트렌드는 늘 존재한다. 하지만 트렌드만 좇다보면 남는 게 없다. 트렌드는 곧 지나가고 새로운 트렌드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지속성에는 '자아'가 필요하다. 남들이 좇으니까 나도 좇아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코로나는 개인적 삶의 회복을 당겼다. 불필요한 모임과 단체 생활을 강요받지 않는 삶. 일부 사람들은 자유로워졌고 누군가는 외로워졌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쳤다면 탈 코로나 시대에는 기울기가 완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남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데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다양한 모임과 만남은 시작되겠지만 그 이전과는 결이 다를 것이다. 의미없는 수다(와 사람)는 줄이고 내 삶의 풍요로움을 찾는데 시간을 쓸 것이다. 그 풍요로움에는 배움이 있고 배움은 솔직함에 대한 목마름이다. 나를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되는 모임에 사람들은 모일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솔직하게 드러내고 솔직하게 살기. 단점을 가리기보다는 단점은 단점대로,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하는 꾸확꾸의 삶. 남의 신경은 적당히 끄고 입고 싶은대로 입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글쓴이 이문연
옷문제 해결 심리 코치
행복한 옷입기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