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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EGG 안티에그 Dec 13. 2021

출판불패(出版不敗)
유혹하는 출판사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 허영출판사를 주의하라


Edited by 주현우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대형출판사에 내 책이?
나만의 책을 만들고 싶다면...


출판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슬로건이다. 대부분 자비출판사에서 홍보를 위해 내거는 문구들이다. 그 주변에는 자비출판의 장점과 방법을 소개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대게 자신이 자비출판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거나, 자비출판을 통해 대박을 친 사례들을 소개한 글들이다. 출판의 패러다임이 변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자비출판이란 저자가 책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대고 출판사가 실제작과 유통을 도맡는 출판 방식을 말한다. 독립출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저자가 모든 제작 비용을 댄다는 점이 기존 출판 방식과의 분수령이 되기에 '자비(自費)출판'이라는 이름이 주로 쓰인다. 자비출판이 대세가 되기 전에는, 출판사가 원고를 선별하고 모든 비용을 투자하는 '기획출판'이 작가가 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출판사들의 어려운 지갑 사정과 갈수록 높아지는 일반인들의 창작욕이 맞물리며 이제는 오매불망 출판사의 연락을 기다리는 쪽이 어리석어 보이는 세상이 도래했다. 출판도 '내돈내산'하는 시대. 마냥 좋게만 볼 수 있을까.



좋은 책을 내고 싶다면?

출판사의 품질 보증 '기획출판'


이미지 출처: pixabay


출판은 전문적인 영역이다. 한 권의 책을 내기까지 수많은 전문가의 노력이 들어간다. 기획 단계부터, 편집, 원고 검수, 레이아웃 구성, 디자인, 인쇄, 유통, 홍보까지. 경험 없는 사람이 호기심 삼아 해볼 만한 일도 아니며,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저자의 인세가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출판은 수많은 전문가가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공을 들여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인세는 보통 10% 정도가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통용되는데, 출판사들의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요즘 신인 작가들에게는 5~6% 수준의 인세가 제시된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책은 '좋은 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좋은 책이란 모든 방면(텍스트, 레이아웃, 디자인 등)에서 완성도가 높은 책이라는 의미다.


독자들이 신뢰하는 대형출판사들은 좋은 책을 많이 낸 출판사들이다. 출판사의 검증을 거쳤다는 사실은 '이 책은 읽어도 좋다'는 일종의 품질 보증이 된다. 과거 출판시장에 양질의 책이 꾸준히 유입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검증과 보증의 선순환 덕분이다. 출판사 브랜드가 구매 의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선행된 연구에 따르면 책을 살 때 고려하는 요소로 저자 지명도와 출판사 지명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질의 책을 꾸준히 내는 저자만큼, 그런 책을 낸 출판사도 신뢰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핵심은 원고가 출판사의 눈과 손을 거치기에, 출판사도 품질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출판사는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원고를 선별하는 거름망을 더 촘촘히 옭아매야 한다. 기획출판의 메커니즘이 전반적으로 책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원고만 내면 5분 만에 뚝딱···

검증 없는 자비출판의 민낯


반면 자비출판은 저자가 제작과 유통을 제외한 나머지 과정을 모두 맡는다. 예외는 있지만 보통은 아무런 편집도 제공하지 않는다. 출판사가 투자한 비용이 없다 보니 자비출판을 선택한 저자에게는 50%를 안팎의 높은 인세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책에는 '나쁜 책'이라는 딱지가 붙기 일쑤다. 전문가의 편집과 검수를 거치지 않다 보니, 맞춤법과 철자 오류가 난무하는 혹은 구성이 허접한 책이 된다는 인식이다. 혹자는 자비출판의 드문 성공사례를 꼽으며 자비출판이 기획출판보다 꿇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그렇게 좋은 책이면 굳이 왜 자기 돈을 들여 펴내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이 글의 전제는 이미 많은 인지도를 쌓은 작가가 아닌 이상 기획출판이 가능한 원고를 굳이 자비로 출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비출판 과정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국내 최대 규모의 자비출판 플랫폼(B 출판사)에서 견적을 내봤다. B 출판사는 먼저 책의 형태를 선택하게 했다. 컬러인지 흑백인지, 사이즈는 얼마로 할 건지, 표지 재질과 책날개 제작 여부를 골랐다. 다음 단계는 원고를 등록하는 단계였다. 표제와 부제를 정하고, 써둔 원고를 올렸다. 그 뒤 도서 제작 목적을 정했는데, ISBN 발부용과 일반 판매용, 소장용 중 하나를 정할 수 있었다. 일반 판매용의 경우 해당 플랫폼 내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며, ISBN을 발부할 경우 다른 유통망으로 판매 활로를 넓힐 수 있다. 'ISBN 발부'를 선택하고 표지 디자인 단계로 넘어갔다. B 출판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템플릿을 입히고 가격 책정 단계로 넘어갔다.


우선 책의 최종 소비자 가격을 임의로 정할 수 있었다. 정가인하(할인)와 외부유통 여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가격을 10,000원으로 정하자, 인쇄비와 수수료, 작업비를 제외하고 권당 3,500원의 인세가 떨어졌다. 제일 낮은 사양으로 제작했을 때 이 정도니, 사양을 추가할수록 되돌아오는 인세가 줄어들 것이었다. 책을 컬러로 바꾸고 표지 재질 등 도서사양을 높이니 인세는 권당 1,500원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단계는 정보를 최종 확인하고 목차와 저자 소개를 입력하는 단계였다. 이 모든 과정을 끝내는 데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B 출판사의 승인만 나면 책이 출판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원고를 그대로 내준다면, 인쇄소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다. B 출판사는 다음 세 가지 경우에 원고를 반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①제작상 문제가 있는 경우 ②저작권상 문제가 있는 경우 ③도서가 아닌 경우다. 세부 사항을 요약하면 아무 내용이 없는 빈 페이지가 반복되거나, 다른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거나, 노트나 다이어리 등의 형식을 갖춘 원고는 반려된다. 이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심사로, 통상적인 수준의 원고 검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비싼 인쇄료에도 내돈내산···

'출간작가' 타이틀을 위해


모든 자비출판이 실패하는 건 아니다. '진흙 속 진주'들도 분명 존재한다.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가 대표적이다. 또 지난해 서점 매대를 휩쓴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 역시 시작은 속성 책쓰기 강좌를 통한 자비출판(당시 제목은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소수일뿐더러 세 원고 모두 출판사 투고 이력이 없다는 점에서 작가가 작품의 가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사례라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자비출판 서적들은 지인들에게만 간간이 판매되며 자기만족의 기능만을 제공한다. '내돈내산'을 통한 자기만족. 자비출판의 본질은 판매보다는 구매, 창작보다는 소비에 가까워 보인다.


발행 부수에 따라 비용은 달라지지만, 자비출판을 하려면 보통 200~300만 원(200페이지 1000부 기준) 정도가 든다. 좀 더 번듯한 책을 만들려면 내지 도수나 제본 종류를 바꿔야 하는데, 많게는 두 배 넘게 가격이 오르기도 한다. 이토록 비싼 자비출판. 다들 왜 하려 하는 걸까. 답은 자비출판사들의 마케팅 슬로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력서에 자신이 쓴 책을 넣으면 지원자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외국 유학보다 더 가치 있는 스펙이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전문가로 인정한다' 등등. 모두 사람들의 인정욕구, 더 나아가 허영심을 부추기는 전략적 문구다. 자기소개서 한 줄이 절박한 이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심화하는 취업난과 자비출판 및 책쓰기 클래스 열풍은 같은 궤적을 그려왔다. '출간작가'라는 타이틀 역시 하나의 스펙이 된 지 오래다.


또한, 물성의 힘은 강력하다. 같은 글이라도 온라인 플랫폼에 올리냐 종이책으로 출간하냐에 따라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 'O주만에 책쓰기 클래스' 업체들이 공략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강조해왔다. 그 과정에서 책은 신성한 배움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때문에 얄팍한 지식으로 말싸움을 하다가도 '이거 책에서 본 건데' 한마디만 하면 상대를 합죽이로 만들 수 있었다. 자비출판은 책에 덧씌워진 신성한 이미지를, 겉치레와 허례허식의 수단으로 역이용하는 발상이다. 그래서 자비출판은 때에 따라 해롭고도 위험하다. '출간작가'라는 직함이 자격 없는 (그러나 돈은 많은) 누군가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되면 각종 경로를 통해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강연 청탁이나 칼럼 기고는 물론, 방송 출연도 하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책쓰기를 주제로 한 어느 책의 소개란에서 발췌한 문구다.


이미지 출처: pixabay



허영 출판(Vanity Publishing)

: 돈 밝히는 출판사를 주의하라


영미권에서는 자비출판(Self Publishing)과 허영출판(Vanity Publishing)을 구분한다. 허영출판은 언뜻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출간하는 작가들을 향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작가들의 허영을 부추겨 돈을 뜯어내는 출판사(Vanity Press)를 멸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작가들이 편집과 검수, 디자인을 하고 모든 인쇄 비용을 지불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하지만 수익 모델이 다르다. 자비출판사는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받고 판매 수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노린다. '어떻게 하면 책이 잘 팔릴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은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허영출판사는 오직 작가들로부터 수익을 내려 한다. 출간된 책의 일정 권수를 작가더러 사라 하거나, 도서반품이 발생하면 저자 인세에서 반품비용을 공제하는 등 리스크를 모두 작가에게 떠넘긴다. 다시 말해 돈 받고 인쇄만 하면 이후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때깔 좋은' 인쇄소나 다름없다.


따라서 허영출판사는 좋은 원고를 모집하는 일보다 책을 낼 작가들을 모집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다. 만약 '좋은 책'에 대한 출판사의 기준과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한 노하우를 제공하는 대신 책쓰기에 대한 장점만 나열해 놓았다면, 어리숙한 작가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허영출판사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대게는 대형서점 배본망을 자랑하거나, 초판을 모두 팔아 수천 부를 또 찍어낸 케이스를 소개하며 물정 모르는 작가들을 유혹한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가격 책정 근거를 정확하게 안내하지 않고, 출판 과정 역시 불투명하게 관리한다. 결과물은 당연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비출판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에서는 그동안 이 둘을 구분 짓지 않아 왔다. 하지만 양질의 자비출판물도 분명 존재하고, 양심적인 자비출판사도 더러 보이는 만큼, 건전한 출판 문화 확립을 위해 자비출판과 허영출판이 명확하게 구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릴 적 서점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구경하던 때를 기억한다. 책이 빼곡한 서점 매대를 훑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골라들고, 그 자리에 서서 단박에 읽어내려간 기억도 떠오른다. 그때는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 혹은 그런 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웬만해서는 인터넷으로 필요한 책만 주문한다. 서점에 가더라도 도서검색대를 먼저 찾는다. 요즘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제목과 목차에 속아 몇 장 넘기다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책도 수두룩하다. 서점 속 만남의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낸 2020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일반서점 수는 2년 전 대비 4.0% 감소한 반면, 독립서점 수는 동기간 무려 14.3% 증가했다. 독립서점의 특징은 대형서점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테마를 정하고 책을 선별했다는 점이다. 독서인구는 해마다 줄고 있고, 남은 독서인구는 늘 시간에 쫓기지만, 좋은 책과의 만남에 목말라 있기에 독립서점이 활황을 맞은 건 아닐까. 누군가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책이 늘어날수록 출판시장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독서 문화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 누구도 독자가 되려 하지 않는 시대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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