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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Aug 28.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1-

공통주제 : 졸업식


  모임의 주최이자 ‘졸업식’을 주제 키워드로 던져 주신 텐더님을 만난 날 같이 지하철을 탔다. 마침 함께 이야기한 적 있던 웹소설(한민트, <악녀는 두 번 산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작품도, 작가의 전작도 회귀 물이라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조금 부러웠던 건 텐더님이 확신에 찬 어조로 “저는 지금까지 사느라 수고했기 때문에 회귀할 수 있다고 해도 안 할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후로 어린아이 혹은 삶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면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공감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을 많이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고 했다. 노트에 무언가 쓰다가 잘못 쓰면 그 위를 스윽 그어버리고 계속 써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그 장을 찢고 처음부터 깨끗하게 쓰고 싶어 하는 타입이라고. 그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우울증과 겹쳐지면서 후회를 반복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줄이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그런 상상을 하지 않지만 그런 류의 ‘회귀’는 여전히 나에게 어떤 기회처럼 여겨진다.

  게다가 하필 첫 주제는 졸업식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엄밀히 말하면 졸업하던 시점)은 내가 언제나 회귀 지점으로 삼고 싶어 했던 인생의 순간들이다. 뭔가 대단한 일(이명박 정권 시절의 중학생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박근혜 당선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단지 이 기억을 가지고 막 초등학교, 중학교, 아니 고등학교 졸업식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좀 빨리 ADHD 치료를 시작할 텐데, 하는 허황된 상상을 꽤 자주 했다. 물론 이렇게 낭만 없는 상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은 전혀 무섭지 않지만 당시에는 막연히 너무나 무서워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이 많으니까. 무엇보다 그때는 읽지 않았지만 지금은 읽은 책들의 데이터 베이스를 가진 채로 인생에서 가장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꽤 짜릿하지 않은가. 아무도 해리포터 시리즈의 결말을 모르는 시점으로 돌아갔을 때 혼자 해리포터의 결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꽤 스릴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멈췄던 상상에 시동을 걸어 스물일곱의 나를 초등학교 졸업식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고등학교 졸업식 이야기를 해보겠다. 집 근처의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꽤 즐거웠다. 졸업식을 이유로 대면 그때 다니던 재수학원의 예비반 수업을 빠질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규칙이나 불편한 교복 같은 것들을 감안해도 여고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중학교 때에 비해 훨씬 사려 깊어진 아이들과도 잘 지냈고 선생님들과도 친했다. 이제 막 스마트폰을 산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고 소란스러운 셀카를 찍어댔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교실을 떠나면서 그때 막 만들었던 페이스북 계정이 무언가 소감을 올리기도 했다. 여기서 보낸 고3 시절이 아주 좋았노라고.

  요즘 웹소설에 재미를 붙이고 여러 독자들의 2차 창작물을 보다 보면 일명 ‘청춘 게이’ 장르가 불변의 유행인데, 그걸 보면 나만 청소년기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향수와 낭만을 품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재밌다. 일본의 버블 경제 배경 청소년 물을 보고 자란 세대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는 남학생 하나 없는 여고를 나왔고(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 기간에 로맨스는 없었고, 교복을 꾸준히 증오하지만 늦여름 노을 지는 교실에 남아 꾸벅꾸벅 조는 그런 배경이 주는 어떤 느낌에 쉽게 무너지고 마는 어떤 약점을 여전히 쥐어주고 만다. 물론 ‘청게물’의 유행에는 그런 청소년기의 거품 같은 낭만 외에 여러 음습한 욕망도 존재하고 있겠지만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이나 <아즈망가 대왕> 같은 톤으로 꾸며진 어떤 고등학교는 다들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는 거니까(?).

  이 이상한 낭만 때문에 나는 그 즐거웠던 3학년 2반 교실을 떠나면서도 나는 내가 꿈꾸던 고교 로망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라는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아마 회귀해도 그 로망을 이루는데 별로 열성적일 것 같지는 않지만. (대체 그게 뭔데.) 아무튼... 졸업식이라는 주제를 보고 대뜸 생전 쓴 적 없는 청게 AU 연성을 쓰지 않기 위해 머리에 힘줬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었지만 이런 글에 의의를 둬도 괜찮은 건지, 1년 만에 블로그 업데이트가 이런 글이어도 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첫 마감을 지켰고 100일 글쓰기 마라톤을 마치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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