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진화
뉴욕, 1980년대 초였다. 항만의 쇳내 대신 마천루 유리창이 반짝였고, 카엘의 후손 리암은 더 이상 동전과 지폐를 세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 녹색 글자가 깜빡이는 터미널 앞에 앉아 있었다. 커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돈이 대서양을 건넜다. “프랑크푸르트에 천만 달러 송금.” 타자 몇 번, 엔터 한 번, 화면 한 줄의 메시지가 전신망을 타고 달렸다. 그는 손끝으로 돈을 옮기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지갑 대신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꺼냈다. 카페 점원이 단말기에 카드를 밀어 넣고 영수증을 내밀었다. “사인 부탁해요.” 손에서 종이돈이 떠난 적은 없는데 계좌 잔액은 줄었다. 옆자리 동료가 웃었다. “이제 현금 들고 다닐 필요 없지.” 리암이 말했다. “대신 내가 언제 뭘 샀는지 기록이 남아.” 동료는 커피를 휘저었다. “기록이 곧 신뢰야.” 리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만큼 어딘가의 서버가 무거워지는 느낌, 그의 삶은 종이가 아니라 신호에 의해 정리되고 있었다.
주말에 고향 집을 찾으면 아버지는 여전히 장롱 속에 현금을 숨겼다.
“은행은 믿을 수 없어. 내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야.”
리암은 미소 지었다. “아버지, 이제 돈은 네트워크에 있어요. 숫자가 더 안전해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눈에 안 보이는 걸 어떻게 믿니.” 대답하려다 말았다.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찌르는 말이었다. 월요일 아침, 검은 월요일이 닥쳤다. 화면이 빨간 물결로 가득 차며 주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전화는 동시에 울리고 상사들은 고함쳤다. “던져! 더 늦기 전에!” 리암은 모니터에 붙은 손가락이 떨리는 걸 느꼈다. 공장은 돌아가고 배는 항만에 정박해 있는데 숫자만이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떨어지죠?” 그가 묻자 옆자리가 대꾸했다. “모두가 떨어진다고 믿으니까.” 그는 그 말이 무섭도록 정확하다는 걸 알았다. 돈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화면이 먼저 만든 현실을 뒤쫓게 했다.
90년대 중반, 회사는 터미널 대신 브라우저를 들였다. “로그인하면 전 세계가 열린다.” 실제로 그랬다. 클릭 몇 번으로 아시아 주식을 사고, 유럽 채권을 팔 수 있었다. 속도는 마치 바람 같았다. 그러나 바람은 때때로 전선을 끊었다. 어느 날 전산장애가 몇 시간을 삼켜버렸고, 고객들이 전화선에 매달려 소리쳤다. “내 돈이 어디 갔어!” 리암은 숨을 고르며 설명했다. 돈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화면에 나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화면에 보이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전자 속에서 신뢰란 종이 보증서가 아니라 픽셀과 로그 파일의 성실성에 달려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는 TV 뉴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네가 옮긴다고?”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무게보다 속도가 중요해요.”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속도가 빠르면 넘어질 때도 빠르지.”
1997년 여름, 아시아에서 불어온 바람은 뉴욕에서 폭풍이 되었다. 낯선 통화들이 연달아 고꾸라졌고, 환율이 하룻밤 사이에 낯선 숫자를 입었다. 장중에 리암은 모니터 세 대를 동시에 번갈아 보며 손가락을 날렸다. “동남아 포지션 줄여, 대체 유동성 찾고.” 거래 상대는 숨 가쁘게 응답했다. 그 사이 뉴스 앵커가 말했다. “긴급 구제 협상에 진전이—” 모든 게 신호였다. 도움의 손길도 신호, 절망도 신호, 회복의 조짐조차 신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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