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무엇일까

빛과 전자의 패턴 속에서 태어나는 의식

by 무이무이

사람은 보통 ‘나’라는 존재가 아주 확고한 실체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의 기억이 그대로 이어지고, 거울 속 얼굴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생각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나는 하나의 확실한 실체다.’ 그러나 과학이 우리의 몸속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확신은 서서히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두뇌에는 약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고, 그 신경세포들은 서로 전기 신호를 주고받으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기억도, 감정도, 의사결정도 모두 그 신호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수십억 개의 뉴런 사이에서 전하가 이동하고 전압이 변하며 전기 신호가 흐르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복잡한 흐름을 “생각”이라고 부르고, 그 흐름이 만들어 낸 연속적인 패턴을 “나”라고 부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힘”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접촉적 현상은 사실상 전자와 전자, 전자와 원자핵 사이의 전자기적 상호작용이 거시적으로 나타난 결과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눈으로 보는 풍경, 손으로 만지는 물체, 귀로 듣는 소리. 이 모든 감각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결국 하나의 공통된 뿌리로 모인다. 그것이 바로 전자기력이다. 양력, 마찰력, 부력, 압력, 장력 등등등....

우리가 책상을 만질 때 손과 책상이 실제로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두 표면의 전자들이 서로 강하게 밀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단단함을 느낀다. 눈으로 보는 풍경도 물체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물체에서 반사된 빛, 즉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결과를 보는 것이다. 귀로 듣는 소리 역시 공기의 진동이 감각세포를 자극하고 그 자극이 전기 신호로 번역되어 뇌로 전달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현실은 전자기적 상호작용이 감각기관을 자극하고, 그 자극이 전기 신호로 바뀌어 뇌에서 해석된 결과다.


여기서 이상한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우리가 세계라고 믿는 것은 사실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패턴이고,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 또한 전기 신호의 패턴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이루는 것도 전자기적 상호작용이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의식도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흐름이다. 바깥의 풍경은 빛의 패턴이고, 그 풍경을 해석하는 두뇌는 전기적 패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은 결국 전자기적 패턴이 또 다른 전자기적 패턴을 읽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 역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어떤 단단한 중심, 몸 어딘가에 들어 있는 독립된 존재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두뇌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기관은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는 것은 오직 신경세포, 이온의 이동, 전위의 변화,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전기 신호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전자기 신호의 패턴일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신경망 속에 남은 연결의 구조이고, 감정이란 특정 회로의 활성 상태이며, 생각이란 전기 신호가 흘러가는 경로다. 그 모든 흐름이 한 순간에 서로 얽혀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느낀다. 마치 거대한 강물이 수없이 많은 물방울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강으로 부르는 것처럼, 수십억 개의 전기 신호가 동시에 만들어 내는 흐름을 우리는 하나의 자아로 경험한다. 자아는 어쩌면 몸 어딘가에 들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흐름 그 자체일 가능성이 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밀어붙이면 흥미로운 사고실험이 가능해진다. 만약 어떤 기술이 존재해서 한 인간의 두뇌에서 발생하는 모든 신경 신호의 패턴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동일한 패턴을 다른 매체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기억의 구조도, 감정의 반응도, 사고의 경로도 완벽하게 동일하게 재현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일까. 새로운 존재일까, 아니면 같은 자아의 또 다른 구현일까. 이 질문은 우리를 낯선 지점으로 데려간다. 자아가 특정한 물질 덩어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패턴 속에 존재할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평생 붙잡고 있던 “나라는 실체”는 어쩌면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사라지는 전자기적 흐름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현실의 모습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물질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빛의 상호작용을 보고 있다. 우리는 사물을 만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전자기적 반발력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전기 신호의 흐름이 두뇌를 가로지르고 있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물질의 세계라기보다 전자기력의 패턴이 만들어 낸 거대한 형상에 가깝다. 그리고 그 형상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전기 신호의 흐름이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거대한 착각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질의 세계 속에서 단단한 자아로 존재한다고 믿어 왔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은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패턴들이다. 바깥의 세계도 패턴이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의식도 패턴이다. 그리고 그 패턴들이 서로를 해석하며 잠시 안정된 구조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나’와 ‘현실’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 생각이 맞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 속에서 잠시 형성된 하나의 특별한 구조일지도 모른다.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 패턴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인식의 경험을 우리는 자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붙잡고 있던 확신이 조금 느슨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로 그때 세상은 더 넓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어쩌면 시작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빛이 그려 놓은 표면이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전자기력이 남긴 흔적이다. 그 뒤편에는 아직 탐험되지 않은 더 깊은 층이 있다. 그리고 그 층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온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불러 온 의식, 혹은 더 오래된 언어로 말하면 영혼은 무엇일까.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낯선 결론에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낸 전자기적 패턴이며, 그 패턴을 해석하는 우리의 두뇌 역시 전기 신호의 흐름이라는 사실이다. 세계도 패턴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아도 패턴이라면,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래전부터 불러 온 의식, 혹은 더 오래된 언어로 말하면 영혼은 무엇일까.

사람은 죽는다. 몸은 멈추고, 뇌의 전기 활동도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의식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만약 자아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패턴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파도가 사라졌다고 해서 바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파도는 물 자체가 아니라 물의 움직임이 잠시 만들어 낸 형상이다. 움직임이 멈추면 파도는 사라지지만, 그 가능성 자체는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의식 역시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라는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정보의 흐름이 잠시 ‘나’라는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패턴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패턴이 나타날 수 있는 근원까지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은 생각을 조금 더 넓은 방향으로 밀어 올린다. 만약 의식이 단지 인간 두뇌의 부산물이 아니라 우주 자체의 더 깊은 배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어떨까. 다시 말해 인간의 의식은 어떤 독립된 창조물이 아니라 우주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수많은 패턴 중 하나일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은 어떤 절대적인 시작과 끝이라기보다, 거대한 배경 속에서 의식의 형상이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과정일 수 있다. 고대인들이 이것을 바라보며 “영혼”이라는 말을 떠올렸다는 상상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물리학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어떤 직관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무엇인가가 “사라졌다”기보다 어딘가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는 직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때 “끝났다”라고 말하기보다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또 나는 늘 하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바로 창세기의 첫 문장들이다. 그 기록은 창조 이전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현실의 질서가 아직 나타나기 전, 모든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묘사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어떤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아직 형태가 드러나지 않은 배경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마치 물결이 일어나기 전의 바다처럼, 아직 현실의 구조가 나타나기 전의 상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이 선언이다. “빛이 있으라.”

빛은 물리학적으로 보면 단순히 밝은 광선이 아니다. 빛은 전자기 상호작용의 전달자다. 즉 빛이 등장한다는 것은 우주 속에서 정보가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전자와 빛이 상호작용하면서 전자기력이 형성되고, 그 상호작용의 패턴 속에서 물질의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빛이 세계를 드러나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형태가 없던 것이 형태를 얻기 시작한다. 창세기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이 장면을 하나의 은유로 읽어 보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창조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물질이 튀어나오는 사건이라기보다, 정보가 의식되고 드러나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나는 이전에도 이야기한 하나의 간단한 공식을 떠올리곤 한다.

존재 = 정보 × 의식

우주를 이루는 근간은 정보다. 물리학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입자의 상태일 수도 있고, 에너지의 분포일 수도 있고, 장의 진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의식되거나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존재라고 부른다. 태양이 존재한다는 말은 단순히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특정한 정보의 구조가 빛과 상호작용하며 드러난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은하도, 행성도, 우리가 만지는 물질도 모두 어떤 정보가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 형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의식이라는 말의 의미도 조금 달라진다. 우리는 보통 의식을 인간의 생각이나 자각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만약 의식을 더 넓게 정의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내가 나를 인식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 속에서 정보가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의식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빛이 전자를 만나 전자기력이 나타나고, 그 상호작용 속에서 원자가 형성되고, 별과 행성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나타나는 이 모든 과정이 정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긴 연쇄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창세기의 마지막 장면도 또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표현 말이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보다 의식의 복제라는 은유로 읽어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흙은 물질을 상징하고, 생기는 어떤 패턴의 활성화를 상징할 수도 있다. 즉 물질의 구조 속에서 특정한 방식의 정보 흐름이 형성되었을 때, 그 패턴이 의식이라는 경험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종이 아니라 우주가 자기 의식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간 의식들이 태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패턴의 근원은 여전히 우주의 배경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느끼기보다 돌아감으로 느끼는지도 모른다. 파도가 사라져도 바다는 남아 있듯이, 하나의 의식 패턴이 사라져도 의식이 나타날 수 있는 근원은 계속 존재한다는 직관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원한 삶”이라는 말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린다. 그것은 육체가 끝없이 유지된다는 의미라기보다, 패턴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형태는 사라지지만 정보와 의식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수많은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고 있는 이 의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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