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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Jan 27. 2016

“연애 꼭 해야 해?”

비연애자 C, S, M, 그리고 B의 사정

“연애 꼭 해야 해?”


C가 물었다. 그녀는 스무 살 때의 첫 연애 이후 만 7년째 연애 없이 지냈다. 같은 반 동기의 구애로 시작된 그녀의 CC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으면 함께 있다는 이유로, 둘 중 하나만 있으면 하나만 있다는 이유로, 타인들이 그들의 상황에 관해 이것저것 묻거나 재미 삼아 몰아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분위기가 특히 싫었다. 연애가 끝났을 때, 그녀는  마음속 돌덩이 하나를 치운 기분이었다. 반 생활은 그만뒀지만, 미련은 없었다. 


‘비연애’에 관한 한 확신범이었던 그녀가 내게 ‘비연애’에 관한 자문을 구한 건 어떤 위기감 때문이었다. 7년 동안, C의 삶은 별 문제가 없었다. ‘멀쩡한 20대 여자’로서 원치 않는 구애의 상황에 놓일 적 많았고, 그럴 때마다 번번이 곤란하긴 했지만(“아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연애할 생각이 없는데 그건 왜냐면요…”) 그녀 내적으로는 충만했다. 그녀에겐 잘 하고 싶은 일과 여가 시간을 채워줄 덕질, 그리고 다른 관계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비연애의 자발성에 대한 의문이 싹트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녀 스스로는 기각해왔지만 우리 사회가 ‘비연애자’들에게 무수히 다그쳐 묻는 그 질문이 마침내 그녀를 함락시킨 것이었다. 그녀가 20대 후반에 들어서며 잠시 멜랑콜리해진 틈을, 그 질문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연애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녀 자신도, 그녀의 남자친구도, 그들 주변인들도 스무 살이었던 그때 다 함께 미숙하여 상처를  주고받은 기억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연애 적령기’라는 시간제한이 그녀 내부의 불안을 건드려 시작된 고민이었지만, 그 바닥엔 조금 더 자발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선택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나는 C에게 세 비연애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냉소주의자 S의 이야기 



회사원인 S는 말하자면, ‘냉소주의자’다. 그는 몇 번의 짧은 연애를 거친 뒤 ‘당분간 비연애’를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당분간은 꽤나 길어져 곧 3년을 채운다. 


S는 여자친구들의 요구가 피곤했다. 예민한 그는 언제나 그녀들보다 먼저 그녀들의 마음이 상하는 기미를 읽었고, 그녀들이 볼멘소리로 예상한 것을 요구할 때면 이미 물 먹은 솜처럼 피로해져 있었다. 달랠 수 있었던 많은 경우, 그는 달래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의문이었다. 이제 겨우 몇 개월을 같이 했을 뿐인 이들은 어째서 그토록 당당하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걸까. S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도대체 고귀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권리 같은 연애를 오래도 이어가는 다른 사람들은  부러움보다는 신기함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요구와 기대와 응석들을 해결하고 사는 걸까. 


그러나 딱 한 번 S는 부러움을 느낀 적 있었다. 그것은 강렬하여 오히려 질투에 가까웠다. 오랜 친구 Y가 곧 결혼한다며 여자친구를 소개했을 때였다. 단아한 외모에 말수가 적은 그녀는 마찬가지로 말이 적고 어릴 때부터 사려 깊었던 Y와 무척 잘 어울렸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Y를 축하하고 돌아온 날 밤, S는 홀로 누워 그들의 생활을 상상해보았다. 온기가 있고 잔잔하며, 말하지 않아도 통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위할 것 같았다. 조용하고 안정적일 삶. 그는 Y가 부러웠다가, 미웠다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새 얼굴도 흐릿해진 그녀를 가지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만나온 여자들과는 다르리라. 아니, 사실은 그녀도 같겠지. S는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S가 Y와 그의 연인을 보며 그랬듯이, 우리는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연인들을 본다. 그러나 바로 S가 Y와 그의 연인을 보며 그랬듯이, 우리는 그들의 ‘꼭 맞음’을 부러워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가 다를 것 같고, 그녀와 Y의 연애가 다를 것 같은 이유는 그들이 서로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S가 이전의 연애에서 느낀 피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타인들과 깊이 소통할 능력이 없었다. 그건 지난한 작업이라 시작하기 전에는 언제나 필패의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녀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런 타인들과 맞추어가며 자신의 예감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확인해가는 것이 곧 관계였다. S는 처음부터 완성품의 관계를 원했고, 우연히 본 완성품에서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모든 냉소주의자들이 그렇듯이, S 역시 지나치게 높은 이상으로 인해 현실을 조소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모범생 M의 사연


대학원생 M은 내가 아는 최고의 모범생이다. 나는 학부시절 그녀가 과 수석을 차지하는 것을 여러 번 지켜보았다. 


늘 공부로 바빴던 M은 대체로 연애에 관심이 없었는데, 대학원 입학을 몇 달 앞둔 어느 가을 처음으로 연애에 도전했다. 대학원 가면 연애 못 하니 미리 해둬야 한다는 선배들의 오지랖에 잠시 솔깃해진 까닭이었다. 두 번의 별로 흥미롭지 않은 소개팅 이후, 세미나에서 알게 된 한 남자가 M의 마음을 흔들었다. 공부하는 분야는 달랐지만 대화가 잘 통했다. 그 역시 M을 마음에 둔 눈치였다.


잘 풀릴 것만 같던 M과 그의 관계가 꼬이기 시작한 건 카톡을  주고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진행하고 있는 연구실의 공동 프로젝트 때문에 연락을 자주 하기가 어렵다고, 말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 건조한 사실이 한 번 보낸 카톡의 ‘1’이 없어지기까지 몇 시간 째 카톡창을 여닫는 동안 M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서운함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했다. 그녀는 그 초조, 그리고 그러느라 어그러지는 자신의 일상이 싫었다. 할 일이라면 그녀 역시 많았다. 


일주일 전부터 약속했던 그들의 네 번째 데이트가 그의 사정으로 취소됐을 때, M은 자신이 지난 일주일 동안 이 만남을 몹시 기다려왔음을 알았고, 그녀의  지난주 일정이 다소 엉킨 것이 그것 때문이었음을 알았고, 더 이상 ‘연애’란 걸 해보고 싶지 않음을 알았다. 설레거나 흥분되는 느낌은 낯설고 혼란스러워 어딘가 위태로웠다. 그녀의 뇌는 본능적으로 이것을 ‘위험’으로 인지했다. ‘연애는 나와 잘 맞지 않아.’ M은 다시 자신의 잔잔하고 청한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더 많은 논문들을 참고해서 때 맞춰 발제를 했다. 연애가 아니라도 그녀는 충분히 바빴다. 


‘자기 통제감’에 목숨을 건다는 점에서, 어쩌면 M 같은 모범생들은 정말로 연애와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잘하면 되는 공부와 달리, 연애는 내 페이스에 언제나 맞춰줄 수 없는 타인을 상대로 거는 것이어서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하다. 상대의 온도와 속도, 밀도는 그의 소관이라, 나의 통제를 벗어난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뿐이다. 자기가 생각한 것이 자기가 생각한 자리에 놓여 있어야 마음이 편한 이들은 그러므로 연애의 상태가 달갑지 않다. 낯설어 이물감마저 든다. 이것만 도려내면 다시 반듯한 일상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반듯함’이란 환상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타인들과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는 까닭이다. 고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 없는 이유로,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삶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통제의 환상을 방해하는 외부적 자극들을 모조리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삶의 상수로 적절하게 수용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연애는 삶의 타자성을 수용하는 과정을 배우는 장이기도 하다. 물론 연애만이 유일한 장은 아니다. 명석하고 현명한 M은 대학원에서 참여하게 된 연구실 프로젝트에서 이 통제 불가능성을 깨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해보았다. 




예술가 B의 사정


일러스트레이터 B는 올빼미다. 밤에 작업을 하다 새벽녘에 잠들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그녀는 별로 약속이 없는 편인데, 약속이 없는 날은 그대로 아점을 먹고 책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이며 무료하지만 안락한 오후를 보낸 뒤 저녁을 들고 나면 다시 밤샘 작업을 시작했다. 종종 술을 곁들였다. 그녀가 3년 전 독립한 이래 만들어진 이 평화로운 생활은 그녀에게 더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의  11평짜리 반지하 자취방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돌아가는 하나의 소우주였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친구들은 하나 같이 그녀의 생활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녀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주 불규칙적인 생활로 비난당했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들어야 했으며, 너무 적게 먹는다고 말한 이조차 있었다. 직장인은 저녁에 시간을 내주지 않는 그녀를  야속해했고, 같은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녀의 작업방식에 대해 섣부른 ‘조언’을 삼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애 같나?’ 연애를 할 때면 그녀는 자주 막막한 물음에 시달렸다. 


그리고 5개월 전, 익숙한 지루한 실랑이 끝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남자친구가 한 시간 뒤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로 요약되는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을 때, 그녀는 그만 연애가 귀찮아져 버렸다. 그녀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통상적인 ‘사랑스러운 여자’ 상에 맞지 않아 당하는 강요들에도 넌덜머리가 난다고 했다. 머리를 기르고 싶지 않았고 문신이 드러난 옷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B는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가 더 익숙한 걸.’ 그녀는 고동처럼 등딱지 같은 방 속에 몸을 웅크렸다. 


우리의 자아에는 중심으로 모이려는 구심력과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를 움직이고 생존하게 하는 건 자기를 보존하고 중심으로부터 단단해지려는 구심력이다. 그녀를 부정하고 ‘개선’하려는 타인들에 지친 B에게는 ‘구심력’의 시간이 필요했다. 구심력은 본능이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중심을 향하는 이 힘 때문에 인간은 잘 변하려들지 않고, 실제로도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타고나기를 보수적이고 잘 경직되는 인간들이 이따금 스스로 변화를 도모하는데, 그 흔하지 않은 순간이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다. 그가 사랑함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고 싶어 지는 것이 사랑이라, 사랑하며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와 바람에 의거하여 자아를 허물고 새로 짓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원심력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더 정확히는 ‘자신을 바꾸어서라도’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구심력이 애써 굳혀 놓은 자아의 경계를 원심력은 좀 더 바깥으로 밀어낸다. 


B의 지난 연인들은 B에게 충분히 매력적이거나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방향성’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요구한 변화는 그녀 자신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반발심만을 불러왔다. 방향성은 중요하므로, 언젠가 그 방향이 일치하고 그녀의 그녀다운 부분들을 너그럽게 수용해주는 멋진 상대를 만났을 때 연애하면 될 뿐 당분간은 구심력 속에서 쉬어도 문제 될 것 없다. 


그러나 쉬면서, 자신의 ‘반발심’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변화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은 자신의 중심이 사라질 것 같은 위협을 느끼기에 변화에 대한 1차적인 반응은 언제나 반발, 곧 ‘구심력’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려와 달리 중심은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대개 변화는 자아의 ‘해체’가 아니라 ‘확장’이다. 자기를 단단하게 지키면 좋을 것 같지만, 인간은 자기완결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구심력 속에만 있다 보면 오히려 자아는 끝없이 중심을 향해 수축하게 된다. 자기를 잃는 것이 두려워 자기에 잡아먹히는 역설이 발생한다. 


기꺼이 변화하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상대가 B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며 두려움에 잠식되지 말 것만을 당부했다. 언젠가 그녀의 등딱지가 갑갑하게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부여한 질서가 관성처럼 지루해졌을 때에는 힘차게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그리고 이건 C와 S와 M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멋진 상대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스스로가 만든 두려움에 잠식되지 말기를.  




연애 꼭 해야 해?


다른 사회적 관계가 단단하고 몰입할 일과 취미가 충분한 이들은, 연애하지 않아도 특별한 결핍이 없다. 성욕은 없는 사람도 있고, 섹스는 연애 밖에서도 가능하다. 연애는 결코 대체 불가능한 ‘필수’가 아니다. ‘연애 권하는 사회’ 때문에, 남들 다 하는데 하는 조바심으로 거름 지고 장에 갈 필요는 전혀 없다. 연애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사람과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한편 연애가 두려운 거라면,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설득하여 맞춰가는 지난한 과정이 두렵고, 내가 세심하게 가꿔온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이 흐트러지는 게 두렵고, 나의 중심과 주체성을 잃을까봐 두려운 거라면, 그 두려움은 이길 수 있고 이길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연애가 안긴다는 그 두려움이란 사실 타자가 안기는 두려움이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내가 완전히 그러잡을 수 없는 타자.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 해도 우리의 삶은 피할 수 없이 타자들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 가장 커다란 고통처럼, 가장 커다란 행복 역시 타자로부터 온다. 연애란 결국 내게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선사하는 타자를 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연애에 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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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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