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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pr 16. 2024

집념의 천재, 브루넬레스키

피렌체의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꽃의 도시 피렌체에 도착하면 도시 어디에서든 중앙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을 찾을 수 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성당이기 때문에 줄여서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이 성당의 이름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다. 높이가 아래서부터 114.5m니까 요즘으로 치면 거의 45층 높이의 건물에 해당하는 이 성당은 15세기 이전까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괴물같은 건축이다.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붉은 돔인데 제작자의 이름을 따라 '부르넬레스키의 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돔은 자그마치 무게가 37000톤에 달한다. 대략 3톤 트럭 12,000대 정도를 공중에 띄워 놓았다고 생각하면 될까. 이 돔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벽돌만 4백만개가 넘어가고 돔 자체의 크기만 보면 폭은 54.8m에 높이는 34m다. 이미 돔 자체만으로도 15층 짜리 고층 아파트의 높이가 되는 셈이니까 아래 예배당까지 생각한다면 30층짜리 고층 아파트 위에 다시 15층짜리 아파트를 올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멀쩡하게 서 있으니 당시로서는 최고의 엔지니어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 건축을 완성한 사람은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예술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다. 브루넬레스키는 마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듯한 이 건축을 성공적으로 완성하는것으로 르네상스가 가진 잠재력을 보여준 예술가다. 


조반니의 결심

14세기 말 아직 브루넬레스키가 아직 어렸던 시절, 피렌체에서는 다시 갑자기 흑사병 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사병의 재앙은 분명 50년 전에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유럽의 공기 중에는 여전히 흑사병의 먼지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피렌체 뿐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들에서는 끊임없이 흑사병 환자들이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사람들의 피부가 검게 변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지옥이 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다.

메디치의 조반니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솔한 인간이었던 조반니는 누구보다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 또한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피렌체의 시민들을 위해 무언가 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반니는 병원을 후원하고 전염병을 막기위해 시에 큰 돈을 기부하는 등의 실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 문을 새로 제작해 신께 봉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된 거대한 문을 만들어서 신께 바치는 것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한 기도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이삭의 희생' 왼쪽은 기베르티, 오른쪽은 부르넬레스키의 출품작, 1401


'이삭의 희생' 콩쿨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 문을 제작할 예술가를 찾기 위한 콩쿨이 열렸다.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었고 심사위원장은 물론 메디치의 조반니였다. 수많은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콩쿨에 참가한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신중하게 출품작들을 심사했다. 우선 7명이 선정되었고 그 중 다시 두 명을 선택했는데 그렇게 최종적으로 선택된 예술가는 젊은 두 조각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위 두 작품은 당시 콩쿨에서 최종적으로 선정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들이다. 심사 위원들은 둘 중 어느 작품을 선택했을까? 우선 왼쪽의 기베르티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목을 칼로 찌르는 순간을 택했다. 영화처럼 가장 극적인 장면을 택한 것이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천사가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손으로 말리는 장면에 더 집중했다. 아마 이 이야기의 교훈을 더 자세히 부각시키려고 했던 모양이다. 조반니를 중심으로 한 심사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두 작품 모두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오랜 심사끝에 승리자가 결정되었다. 최종 승리자는 이 장의 주인공 브루넬레스키가 아니라 바로 기베르티였다. 아마 심사위원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을 찌르려고 하는 그 찰나를 주제로 보여주는 기베르티의 선택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던 모양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도 훌륭하지만 기베르티가 보여준 표현력을 보면 심사위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반니는 여전히 고민이 있었다. 두 작품 중 무엇이 더 뛰어나다고 쉽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둘 다 모두 뛰어났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고민 끝에 조용히 두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둘의 실력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브루넬레스키가 기베르티를 돕는 느낌으로 두 사람이 같이 작업하는것은 어떻겠냐고. 

하지만 조반니다운 훈훈함이 느껴지는 이 제안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미 패배로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가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그렇게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남자였다.




로렌조 기베르티,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문과 동쪽문


결국 승리자 기베르티는 이후 장장 21년에 걸쳐 이 거대한 청동문을 완성하게 된다. 왼쪽이 그렇게해서 완성된 세례당의 북쪽 문이다. 총 28개의 장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4명의 성자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명실상부 르네상스 초기의 최고 걸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기베르티는 이 북쪽 문을 성공적으로 완성 한 공적을 인정받아, 연이어 1424년에는 동쪽 문까지 제작 의뢰를 받게된다. 오른쪽이 그 동쪽 문이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을 보고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진정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느껴질만큼 뛰어나다."


확실히 두번째 제작한 동쪽문은 첫번째 문 보다 화려함의 측면에서나 완성도의 측면에서나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기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를 제치고 르네상스 초기 예술가 중에 가장 빛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곤조

그렇다면 기베르티가 그렇게 조각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콩쿨에서의 패배는 자존심 강한 24살 조각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된다.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지금까지 열심히 하던 조각은 내팽게치고는 건축에 몰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고작 콩쿨에 한번 진 걸로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그런 남자였다. 시쳇말로 '곤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어쩌면 그런 '곤조'가 없었다면 애초에 브루넬레스키는 예술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법을 공부해야 할 운명이었지만 그런 일은 나를 부유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인류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저 앉아서 문서를 다루는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을 창조해 사람들에게 직접 감동을 주는 사람, 예술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기고 자기 고집대로 예술가가 되기로 선택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선택했던 조각을 버리고는 새롭게 건축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브루넬레스키는 조각 콩쿨에서 기베르티에게 한계를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베르티를 이기지 못하고 조각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으니 차라리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원의 도시, 로마로

콩쿨에서 패한 다음 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브루넬레스키는 9살 후배 동생이었던 조각가 도나텔로를 끌고 영원의 도시Eternal City, 로마로 갔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 일종의 '유학'을 간 셈이다. 

당시 피렌체의 시민들은 광장이나 식당, 술집 그 어디에서든 고대 로마의 영광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르네상스의 분위기가 점점 북 이탈리아에서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를 '교양 있는 대화의 주제'로 소비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다고 진짜 로마로 가서 고문서를 뒤져가며 로마의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진짜로 로마로 가서 로마 건축을 연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번 '유학'의 결과로 로마 건축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지오토가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처럼 자신은 새로운 건축의 창시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 직접 가 보니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영원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도시의 상태가 너무 나빴던 것이다. 잡초가 무성한 폐허같았던 로마의 건축들은 지난 중세의 천 년간 거의 버려져 있었다. 중세의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콜로세움을 포함한 로마의 건축들은 끔찍했던 '기독교 박해'를 상징하는 건축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로마의 폐허를 뒤져가며 연구를 시작했다. 조각가였던 동생 도나텔로가 신나서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건축들을 연구했다. 

로마 하면 '콜로세움 경기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로마인들은 뛰어난 건축기술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난 천 년간 로마의 건축 기술은 완전히 잊혀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고대 로마 건축의 공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브루넬레스키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참고자료도 없이 모든 연구를 완전히 스스로 해야 했다. 그저 로마의 건축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스케치하고 치수를 재고 건축 방법을 머릿속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도나텔로와 함께 돌아다니며 사원, 대성당, 수로, 목욕탕, 아치, 콜로세움, 원형 극장, 거의 모든 종류의 건물을 쉬지 않고 스케치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열정은 엄청났는데, 도나텔로를 데리고 로마에서 거의 40km 떨어진 로마나 캄파냐 외곽 지역까지 돌아다니며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고대 로마의 조각과 건축을 연구했던 것이다. 


로마의 판테온, 2세기

판테온

그중에 특히 브루넬레스키가 관심을 가졌던고 건축은 판테온Pantheon, 즉 만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2세기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성한 신전으로 이름 그대로 '세상 모든 신들을 위해 바쳐진 신전'이다. 그런데 로마시절 새워진 이 판테온을 두고 중세의 사람들은 '악마의 건물'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유일신을 믿는 중세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만신, 즉 '모든 신들'의 건물이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 나쁘지만, 무엇보다 중세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어떻게 저런 거대한 구조물이 천년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듯한 거대한 사이즈의 돔이 지지대도 없이 스스로 버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악마들이 이교도의 건물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판테온이 버틴 세월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악마를 고용했다고 믿을만하다. 돔의 폭은 43m이고 중량만 자그마치 4500톤에 달하는데, 지난 1,300년간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멀쩡하게 그 중량을 버티고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잘 버티는 바람에 이탈리아인들은 여전히 관광객을 유치하며 입장료를 받고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판테온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천년이나 버티고 있을 수 있었는지, 돌과 철구조는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자세히 눈으로 관찰하고 하나하나 정확히 그림을 그리고 건축 방법을 추론해 본 것이다. 

그의 '고집'은 여기서 꽃을 피웠다. 그는 도나텔로가 피렌체로 돌아간 뒤에도 혼자 남아서 판테온을 연구했는데 잊혀진 '고대 건축의 비밀'을 자신의 손을 밝혀내겠다는 그의 의지는 결국 나중에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원근법의 탄생

잠시 덧붙이자면 브루넬레스키의 업적을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는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돔이고, 두 번째는 '원근법의 발명'인데, 회화의 역사를 바꾼 이 발명은 브루넬레스키가 '로마 유학'시절에 기본 개념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근법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로마의 건축들과 유적들을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도시 풍경을 그릴 때 멀리 있는 건축들일수록 작게 그리게 되는데, 그렇게 계속 점점 작아지다 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그림에서 멀리있는 대상은 갈수록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작은 한 점'이 될 때까지 작아지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소실점Vanishing point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순간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나중에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연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점점 이론화시켜 회화의 역사를 바꾼 원근법을 발명하게 된 것이다.


브루넬레스키, 죄 없는 자들을 위한 병원Ospedale degli Innocenti 디자인, 1419–1445


다시 고향으로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더 이상 조각가가 아닌 건축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맡은 건축은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으로 평가받는 '죄 없는 자들을 위한 병원Ospedale degli Innocenti'이라는 고아원 병원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건축이지만, 이 건축은 로마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둥근 아치와 기둥장식, 무엇보다 완벽한 수학적 비례로 설계된 건축이다. 위에 보이는 것 처럼 기둥의 높이와 기둥 사이의 거리가 일치하고, 기둥 사이의 중앙점은 아치 원의 끝점이 됩니다. 수학적 비례는 앞으로 계속 등장할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적인 원칙이 될 것이다. 수학적 비례를 사용한 것은 더 튼튼한 건축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앞서 파르테논 신전과 밀로의 비너스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수학적 법칙이 숨어있다'라고 생각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간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을 어느 젊은이가 완성했다는 소식에 조반니가 찾아갔다. 조반니는 몇 년 전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후 대차게 떠났던 이 브루넬레스키라는 청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건축의 완성도에 감탄한 조반니는 이후 그에게 로렌조 대성당 건축을 맡겼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건축의 설계를 맡으며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더욱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로 만들어 준 건축은 무엇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이다.


돔의 문제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통칠 '피렌체 대성당'은 원래 한세기 전 1296년 지오토의 시대에 처음 착공된 건축이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점점 성장하는 도시 피렌체의 위상을 뽐낼 대성당을 기획했고 건축가 아르놀포Arnolfo di Cambio를 고용해 설계를 맡겼다. 야심차게 시작된 피렌체 대성당은 1380년 일단 본당까지는 완공되었지만 문제는 돔이었다. 아르놀포의 초기 설계대로 건축한다면 돔이 붕괴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못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태로 40년 동안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만약 계산 실수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쪽이 무너지기 시작 한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니까 이를 해결할 만한 배짱과 실력이 있는 건축가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은 지난 40년동안 뚜껑이 열려있는 채로 비를 맞고 있는 피렌체 대성당을 아마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1418년, 피렌체 정부는 드디어 이 일을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 얼마가 들어갈지 상상조차 안 되는 건축 비용은 당대 최고의 상인 길드였던 피렌체 양모 길Arte della Lana에서 치르기로 했다. 물론 그 뒷배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과연 어떤 건축가가 맡아서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피렌체는 200 플로린 금화라는 거액을 걸고 공모전을 열어 유럽 전역의 건축가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 돔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천재'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응모 결과 전 유럽에서 총 12명의 예술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광장에는 이들의 응모작으로 제출한 거대한 모형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어떤 모형은 집채만 하기도 했다. 12개의 모형들이 광장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출품 모형,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심사위원들은 12명의 건축가들을 불러 한명 한명 설명을 들어가며 심사를 시작했다. 오랜 심사 끝에 최종으로 2명의 건축가가 선택되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번에도 최종 2인에 오른 것은 다름아닌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지난 17년간 한 명은 건축가로, 다른 한 명은 조각가로 살아왔는데 다시 한번 높은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심사위원들에게 나는 나무 지지대 없이 충분히 돔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대한 돔을 완성하려면 중간을 가로지르며 하중을 버텨줄 큰 기둥 나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피렌체에서는 애초에 길이가 45m나 되는 나무 기둥을 구할 수조차 없었는데 나무 지지대 없이 건축할 수 있다는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결책을 설명하는 브루넬레스키의 '톤 앤 매너'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시종일관 입술을 꾹 닫고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자세히 설명하기를 주저 했다. 아마 자신의 새로운 건축 아이디어를 기베르티가 훔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기베르티에게 패배해 17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심사위원들을 난처하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공사라는 걸 모두 알고 있는데, 최종 2인으로 뽑힌 사람이 적극적으로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뚱하게 앉아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심사위원회도 브루넬레스키의 태도보다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브루넬레스키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설계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응모에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은 브루넬레스키였다. 하지만 위원회는 17년 전과 비슷한 조건을 내 걸었다. 기베르티와 공동 작업을 해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아마 위원회는 브루넬레스키의 무뚝뚝한 태도에 불안함을 느껴 그래도 협조적이었던 기베르티를 이용해 상황을 컨트롤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격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베르티와는 절대로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위원회를 상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큰 공사였기 때문에 위원회는 끈질기게 브루넬레스키를 설득했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드디어 브루넬레스키가 마음을 착하게 고쳐 먹은 것일까? 그럴 리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이 막상 시작되자 기베르티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 기베르티가 무언가를 해놓으면 다음날 어떤 바보가 이런 식으로 공사를 해 놓았냐고 소리치며 해체해 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베르티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돔 건축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베르티가 아니라 바로 브루넬레스키였기 때문이다. 결국 건축의 주도권은 브루넬레스키에게 넘어가고 기베르티는 프로젝트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천재의 해결책

돔 건축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문제는 돔이 중력에 의해 붕괴하는 것이다. 수만 톤의 돌이 아래로 짓누르는 것은 마치 어린이용 축구공 위에 엄청 뚱뚱한 사람이 올라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잠시 무게를 버틴다 해도 결국 공은 옆으로 터져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돔도 벽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면 옆으로 터져버리고 만다. 일단 브루넬레스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과 쇠로 된 4개의 거대한 체인으로 돔을 내부에서 감싸는 방법을 구상했다. 축구공이 뚱뚱한 사람의 무게에 짓눌릴 때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공의 옆면을 두꺼운 끈으로 칭칭 동여 메는 것과 비슷하다. 

두 번째는 돔을 외부와 내부의 2중 구조로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판테온을 보고 배워온 것이다. 판테온의 돔은 외벽과 내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피부와 뼈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외부 돔은 피부의 역할, 그러니까 비바람 같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돔을 보호하고, 내부 돔은 중량을 견디는 뼈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렇게 이중으로 설계하면 외부 돔과 내부돔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 무게도 줄일 수도 있었다.


로마의 트라야누스광장의 벽돌 패턴와 브루넬레스키 돔의 패턴


또 한 가지 해결책은 '헤링본Herringbone 구조'로 벽돌을 쌓는 것이었다. 헤링본은 '청어 등뼈'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오늬 무늬'와 비슷한 패턴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로마에 여행을 갔다가 로마 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위와 같이 벽돌을 지그재그로 쌓아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세로 벽돌들이다. 중간중간에 서 있는 이 벽돌들은 일종의 일종의 '중간 기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을 여러 권을 그냥 세워놓으면 버티지 못하고 도미노처럼 한쪽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중간에 기댈 수 있는 받침대를 하나 세워 놓으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구조 덕분에 벽돌들은 건설 도중 흘러 떨어지지 않고 더 효율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사실 당시에 이런 건축 방법은 전례 없었던 것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이런 전례 없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애초에 완성할 수 없는 건축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막상 건축이 시작되자 일꾼들은 낯선 건축방식을 지시하는 브루넬레스키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단순한 일꾼이 아니라 석공 조합Masonry의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건축쪽에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공법을 지시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 브루넬레스키를 신뢰하게 된다. 브루넬레스키가 벽돌들을 공중으로 올리기 위한 기중기를 직접 제작했는데 이 기중기는 고작 소 한 마리의 힘으로 많은 벽돌들을 한번에 천장까지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효율이 좋았다. 일꾼들도 이정도 천재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브루넬레스키의 기중기는 근대 이전까지는 최고의 효율을 가진 기중기였다고 한다. 

거대한 돔을 완성하는 일은 마치 군대를 운용하는 것과 같았다. 브루넬레스키 입장에서 '병사'들인 일꾼들은 엄청난 높이에 매일 올라가서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엄청난 체력소모가 있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임산부들이 먹는 특식을 제공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포도주에는 절반의 물을 섞도록 했다. 일꾼들은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 만큼은 엄청나게 반대했던 모양이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총 책임자로서 무엇보다 안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만 개의 벽돌을 쌓는 일은 몇 달 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브루넬레스키와 일꾼들이 매일같이 수십미터의 높이에 올라가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했음에도 한 달에 고작 30cm 이상 벽돌을 올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이 작업은 총 16년 23일이 걸렸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거기에 더해 웬만한 끈기 없이는 애초에 완성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1436년, 드디어 돔이 완성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벽돌을 놓는 것으로 돔은 최종 완성되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은 그렇게 오랜 노력 끝에 완성될 수 있었다. 집념을 가진 한 천재의 승리라고 해야할까. 완성된 돔의 크기를 이해하려면 저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의 크기를 보면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사람들이 꼭데기 까지 올라가서 피렌체의 시내 전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2중 돔의 빈 공간 사이에 계단을 설치했는데 이 계단은 지금도 멀쩡하기 때문에 여전히 피렌체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 중 하나로 유명하다. 돔에 올라간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일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돔을 브루넬레스키는 자그마치 16년간의 끈기로 완성해 낸 것이다. 


건축가의 지위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속에 지난 100년간 묵어있던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아무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돔을 그가 완성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당시 유럽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피렌체의 수준에 걸맞는 유럽 최고 크기의 돔을 가지게 되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오토의 그림을 두고 많은 피렌체인들이 자랑스러워 했던 것처럼, 이제 피렌체인들은 누구나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 자체로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가 브루넬레스키를 통해 다시한번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이후에도 10년간 피렌체의 최고의 건축가로 활동하다 1446년 죽게 된다. 다만 아쉽게도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이 설계한 돔이 최종적으로 완공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돔 위에 올릴 작은 집처럼 생긴 장식을 '큐폴라Cupola'라고 하는데 돔 자체는 1436년에 완성되었지만 큐폴라가 완성되는 데는 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꼭데기의 큐폴라는 브루넬레스키의 설계에 따라 1461년 그의 친구 미켈로초Michelozzo 에 의해 완성되었고 맨 위의 금빛 구리 공과 십자가는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래서 돔이 최종적으로 완공된 해는 1469년이다. 

돔의 구리공을 완성했던 베로키오의 작업실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라는 젊은 견습생이 있었다. 베로키오는 이 무거운 구리공을 들어 올리기 위해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했던 그 기중기를 사용했는데 다빈치는 이 기계를 직접 보고는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버린다. 그래서 브루넬레스키의 기중기를 관찰하면서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알려진 것처럼 다빈치 또한 수많은 기계들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다빈치가 유독 기계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마 젊은시절 브루넬레스키의 이런 천재성을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기의 천재들

브루넬레스키의 유해는 자신이 돔을 완성시킨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지하에 묻히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피렌체 대성당에 가면 지금도 그의 묘비를 볼 수 있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CORPVS MAGNI INGENII VIRI

PHILIPPI S BRVNELLESCHI FLORENTINI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여기 잠들다


그는 정말 르네상스 초기의 위대한 천재 중 한명이었다. 고집 센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로마 방문을 통해 로마 건축을 연구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시대를 열었다. 실제로 이후 등장할 성 베드로 성당 같은 르네상스의 뛰어난 건축들, 그리고 앞으로 4세기동안 건축될 유럽의 새로운 건축들은 모두 브루넬레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은 모두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을 통해 그림을 그렸으니 브루넬레스키는 명실상부 르네상스의 초석을 깔아놓은 위대한 '초기의 천재들' 중 한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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