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튼 아카데미> 줄거리 및 리뷰
바튼 아카데미 줄거리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인 바튼 아카데미. 털리는 그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다. 머리는 좋은지 곧잘 괜찮은 성적을 받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면전에서 욕을 하는 일은 다반사고 패드립도 서슴지 않는다. 폴은 털리를 비롯한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그는 꽉 막힌 사람으로 학생 사이에서 유명하다. 특히나 그의 시험은 점수가 짠 걸로 유명한데 대다수 학생이 F를 면치 못한다. B+를 받은 털리가 클래스 최고 성적일 정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폴은 동료 교사에게 휴일 당번을 부탁받는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마침 그는 크리스마스 계획이 없다.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수많은 휴일 중 하나에 불과하다. 휴일 당번이 아니어도 학교에 머무를 작정이었으니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털리는 스키 여행을 갈 생각에 들떠있다. 몇 달 전부터 어머니와 약속을 잡았는데 급하게 학교로 전화가 온다. 새아버지와의 신혼여행 때문에 스키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말고 이번 방학만큼은 기숙사에 머물러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의 전화가 말이다. 그는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 명의 동급생과 함께 폴의 지도를 받으며 기숙사 생활을 연장한다.
이 기숙사의 밥을 책임지는 것이 메리였다. 그녀는 이 학교에서만 수십 년간 주방장을 맡아왔다. 월남전에서 아들을 잃은 그녀는 다른 학생들을 아들처럼 여기고 밥을 짓는다. 그녀 역시 까탈스러운 성격과 맛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갖고 있어 동료들에게 좋은 얘기를 듣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들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체력이 중요하다며 강조하는 폴은 아침 댓바람부터 아이들에게 체력 훈련을 시킨다. 학생들의 불만은 가뿐히 무시하며 역사 수업도 강행한다. 학생들은 이에 환멸을 느끼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며칠 뒤 구세주가 나타난다. 기숙사에 머무르게 된 학생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유명한 사업가였는데 아들과의 기싸움을 포기하고 헬기로 데리러 온다. 친구는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스키 여행을 데려간다. 어머니와 연락이 되지 않던 털리만 빼고.
커다란 학교에 학생들과 교사는 모두 사라지고 폴과 털리, 메리. 세 사람만 남는다. 이들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기도 하고 숨바꼭질(?)을 하던 중 큰 사고에 휘말리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자 폴은 털리의 소원 하나를 선물로 들어주고자 한다. 그의 소원은 보스턴에 가는 것이었다. 역사 박물관에서 현장학습을 하고 야외 서점에서 책 구경도 하며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진 듯했다.
다음 날, 영화를 보던 중 털리가 화장실을 간다며 빠져나온다. 이상함을 느낀 폴이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털리는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가려 한다. 출발 전에 붙잡은 폴을 보며 털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한다. 이들이 향한 곳은 한 정신병동. 털리의 아버지는 치매 증상을 보이며 털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혼자 여행을 간 것에 상처받았던 털리는 또 한 번 상처를 받는다.
관객을 마구 웃기고 울리는 영화
작품은 진중한 무드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쾌활하다. 코미디로 장르가 구분되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굉장히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듣는 사람을 아랑곳 않고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내비친다.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어떤 통념과 규범은 이들 앞에 송두리째 무너져내린다. 케케묵은 고정관념이 무너져내리는 걸 지켜보며 관객들은 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교사인 폴은 학생들에게 촌철살인 시험 평가를 날린다. 그는 인기 많은 교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교사의 몫이라 생각한다. 아이들과의 교감, 인간적인 교류는 그에겐 사치다. 때로는 비꼬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쏘아붙이며 가식의 가면을 거부한다.
털리는 트러블 메이커다. 친구의 약점을 찾아 놀리기 바빴으며 단지 장난을 치기 위해 친구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심지어 선생님인 폴을 놀리고 술래잡기 아닌 술래잡기도 벌인다. 메리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도 꼭 바로잡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타입이다. 어느 정도 솔직하냐면 죽은 자신의 아들을 칭찬하는 폴의 면전에서 아들은 당신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를 전할 정도다.
이들의 솔직함은 진지해지는 영화 속 분위기를 밝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리 가볍지 않음에도 영화가 시종일관 즐거울 수 있던 건 솔직함으로 무장한 등장인물들이 이야기의 전환을 빠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아픔과 트라우마가 등장할 때 관객들은 상황에 몰입하고 그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눈물을 흘린다. 동시에 이들이 극복하는 방법이 너무나 재빠르고 솔직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예술 영화로 구분되는 탓에 어렵거나 지루한 영화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유쾌한 작품은 상업 영화에서도 자주 보지 못한 속도감 있는 전개였다.
한 쪽 다리가 짧은 나에게 혹은 당신께
작품 속 주인공인 세 사람의 공통점은 결핍이다. 폴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출해 모든 연을 끊고 산다. 털리는 아버지의 정신병동 입원, 어머니의 재혼과 마주하며 실질적 고아 상태에 놓인다. 메리는 임신 중 남편을, 그리고 몇 해 전 아들을 전쟁으로 잃는다. 모두가 가족과 연이 끊긴 외로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 번도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다. 식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트리를 장식하는 일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가장 큰 연휴인 크리스마스에 학교에 남는다. 서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털리와 폴은 시종일관 으르렁댔으며 쉽사리 교집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크리스마스에 둘러앉아 밥을 먹은 게 처음이라는 털리의 말에 폴과 메리 역시 무언가를 깨닫는다. 가족의 온기를 느끼고 웃음을 나눌 수 있던 기회를 놓쳐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들이 진짜 가족은 아니다. 단 한 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고 이들이 전에 없이 끈끈한 유대로 이어질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을 돌아볼 수는 있다. 슬픈 감정 때문에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현실의 삶, 인간관계의 중요성, 이루고자 했던 것, 되고 싶던 것 따위 등 수없이 놓쳐왔던 소중한 것들을 돌아본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타인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깐깐한 원칙주의자 선생님도, 매번 아들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던 주방장도, 사고뭉치 문제투성이 학생도.
폴과 털리, 메리는 한 쪽 다리가 짧은 의자다. 똑바로 서있어도 곧장 중심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결핍은 이들을 태생적인 불안 상태로 만든다. 바로잡으려 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태로 금세 돌아갈 수밖에 없다. 비틀거리던 이들은 허전한 한 쪽 다리 대신 서로의 몸에 기댄다. 혼자서는 바로 설 수 없을지라도 함께라면 서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지하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래 걸렸을지언정 정확히 도착했으니까.
이들의 연대가 일회성의 소모적인 형태가 아님을 영화는 후반부에 아주 명확히 보여준다. 정신병동의 아버지 병문안을 문제 삼아 털리의 부모님이 학교를 찾는다. 폴이 소환되자 털리가 문밖으로 쫓겨난다. 교장실 앞에서 초조하게 앉아있던 털리에게 메리가 다가와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폴은 털리의 일탈이 아닌 자신이 주도한 현장 학습이었다며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털리는 폴의 마지막을 뜨겁게 배웅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것. 아끼는 것을 내어줄 줄 알게 되는 것. 혼자가 좋다던 등장인물들은 러닝타임의 끝자락에 가서야 비로소 연대의 의미를 깊이 깨우친다.
호밀빵으로 은유한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다. 일반적인 시네마스코프 비율이 아닌 1.66:1 비율로 제작한 것 역시 그때의 정취를 내기 위해서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사 로고, 특유의 그레인 질감 등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다소 뻔한 플롯의 이야기였음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70년대 보다도 더 과거의 어떤 소설과 이 영화가 겹쳐 보였다. 바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말이다. 1951년 발표된 이 소설은 문제아 고등학생을 다룬다. 성적이 좋지 않고 교우관계도 엉망이던 홀든이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방황하는 이야기인데, 작품 속 주인공인 털리가 겪는 이야기와 아주 유사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친구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염세적인 이야기를 하던, 그리고 병문안을 빌미로 사관학교로 강제 전학을 시키려는 그의 부모님의 모습 등이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 홀든과 닮아있었다.
홀든 역시 존경하던 선생님이 있던 것도 비슷하다. 물론 홀든의 경우는 그 선생님께 뒤통수를 얻어맞게 되며 더 큰 나락으로 빠지는 데 반해, 작품 속 털리는 그토록 싫어하던 폴 선생님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게 된다. 그럼에도 미성숙한 소년들의 복잡한 심리를 다뤘다는 점, 문제아 주인공이 퇴학에 몰린다는 점,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주인공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두 작품은 원작과 리메이크작이라 봐도 무방했다.
비슷하다고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에 이 작품을 은유한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는데 털리가 룸서비스로 도착한 호밀빵을 집어먹던 장면이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한다는 사실이 들통나 말을 돌리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샌드위치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호밀빵이네요? 내가 좋아하는 건데
여기서 호밀빵은 단순한 음식이나 기호가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 샐린저의 소설이 되는 것이고 결국엔 그 역시 방황을 멈추고 성장하는 과정에 놓였다는 걸 은유하고 있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테지만 언젠가는 폭풍이 지나가듯 성장통의 시기가 지나면 그는 한 뼘 더 커진 어른이 되어있으리라.
어디를 보아야 하는가?
폴은 지독한 근시다. 매번 자신의 눈을 다는 것 마냥 안경을 고쳐 쓴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 눈은 앞을 보는데 왼쪽 눈은 약간 위쪽을 향해 있다. 삐뚤어진 눈은 악담을 쏟아내는 그의 행실을 더 표독스럽게 보이는데 공헌한다. 털리 역시 어떤 눈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의 나쁜 눈은 세상을 향해 닫힌 마음을 의미한다. 폴은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세상에게 상처받은 인물이다. 어쩌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에겐 더 편한 상황일지 모른다. 부모님과의 이별 후 그는 제대로 된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때로는 호감을 갖는 이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좀처럼 발전시키지 못한다. 닫힌 창으로 바깥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닫힌 그의 마음으로는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다시 털리의 말로 돌아와서 그는 제자의 볼멘소리에 "다들 그렇게 말한다" 정도로 치부한다. 즉 폴에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보여줄 사람도 없거니와 보여줄 생각도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어느 쪽 눈을 봐야 할지 그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데 눈의 방향 같은 사소한 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털리와 헤어지기 직전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이쪽 눈을 봐야 해"라고 알려준다. 이는 털리와 그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폴이 세상을 바로 보려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의미도 된다. 매사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삐딱하게 보여지는 것에 거리낌 없던 그가 이제는 조금 반듯하게 보여지길, 그리고 똑바로 볼 수 있길 희망하게 된 것이다.
사소한 변화일지 모른다. 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던 작은 변화가 모여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폴과 털리의 이별이 슬프지 않았던 이면에는 이런 변화가 있다. 그들이 이전처럼 반목하고 서로를 믿지 않으며 비난하기만을 위해 살지 않을 것임을 변화를 통해 은유했기 때문이다. 꽉 잡은 두 손, 마주한 강렬한 눈빛에는 전에 없이 반짝이던 삶에 대한 의욕,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함이 담겼다. 이들은 더이상 고집불통의 교사도, 사고뭉치 학생도 아니다. 서로의 안녕을 바랄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진짜 어른의 모습만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