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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꽃 Aug 01. 2023

사소한 부상자의 맨발 산책

팔을 다친 지 2주 만에 깁스를 풀고 보호대로 대체했다.      


장점 

1. 부상당한 왼손이 깁스를 했을 때보다 오른손을 많이 도울 수 있다. 진통제를 먹으면 양손 타이핑도 가능하다. 달걀을 두 손으로 깰 수 있다.

2.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할 때 왼팔을 내내 위로 들고 있지 않아도 되고, 힘이 훨씬 덜 든다. 

3. 살살이어도 양쪽 팔을 닦을 수 있고, 등도 조금은 더 닦을 수 있다.

4.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의 속도가 좀 빨라졌다.     


단점    

1. 손목을 움직이거나 팔꿈치를 접었다 폈다 할 때 통증이 느껴진다.

2. 여기저기 멍과 피멍이 든 팔과 손을 보면 겁이 난다.      


장점이 더 많다.

무엇보다 이 더위에 깁스는 고문이다.     


응급실에서 보았던 환자들에 비하면 사소한 부상이지만 무기력한 상태로 지냈다. 하지만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평소보다 산책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것. 신고 나간 슬리퍼를 벗고 맨땅의 산책로를 느릿느릿 걸었다.     

ⓒ pixabay

무언가 결핍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있다. 신체적 제약이 생기니 오감이 열리는 것 같다. 여름을 더 여름답게 해주는 매미 소리가 더 또렷이 귀청을 울리고, 산책로에 이어진 진초록의 나무 터널이 더 깊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흙냄새, 엽록소 냄새에 큰숨을 내쉰다. 샛강에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빛과 나무 터널 어둑한 그늘의 대비에 잠깐 발을 멈추기도 한다.


사색의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입은 사소한 부상에 대해서도. 나를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라는 신호였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사색은 재미있는 결론으로 끝났다. 6년 전 다리 골절 이후 내가 못생기게 말하고 행동했던 걸 다 합친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부상은 너무 작은 벌이었다.ㅎㅎ 

이 기회에 낮은 마음이 되어본다.


* 다친 왼손의 손톱은 더디 자라고, 다치지 않은 오른손의 손톱은 빠르게 자란다. 왼손에 닿아야 할 물기까지 오른손이 거쳐가기 때문일까. 왼손은 아직 오른손 손톱을 깎지 못한다. 사소한 부상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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