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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r 25. 2019

흙수저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

욕먹지 않기 위해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나의 글과 신상에 대한 트윗을 보았다.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은 고작 3년 일하고 얼마나 돈을 모았겠냐며, 결국 빚 없는 있는 집 자식이나 갭이어로 세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트윗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가, 보면 볼수록 재밌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캡처본을 보내주고 다녔다. 이것 봐. 존나 웃기지 않음? 나보고 있는 집 자식이래.. 그러면 친구들은 “있는 집 자식 사과집 더 친하게 지내자”나 “유유메나 작가 인정ㅇㅇ”이라고 답장을 한다. 책은 팔리지 않고 있지만 잠시 셀러브리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관종의 반응



이런 대중의 반응에 대한 적절한 피드백을 알고 있다. 흙수저 고백이다. 왜, 퇴사하고 해외여행을 가거나, 창업을 하거나, 하다못해 유튜브에 명품 하울(*구매 후기)을 올리는 사람들까지 모두 끊임없이 본인의 형편을 최소화해서 말하지 않던가. “저 금수저 아니에요. 저도 10년 간 열심히 번 돈으로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뿐이에요.”이라던가, 본인의 학자금 상환기, 월세방 평수 고백이 줄줄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그들이 증명한 가난을 들으며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이 시대의 청년"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부여한다. 듣고 보니, 당신은 누릴 자격이 있는 개천용이시군요!


자격을 부여하는 주체도, 자격을 얻은 대상도, 도대체 그 자격이라는 게 뭔지도 모호하지만 이런 흙수저 고백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고백은 대중의 지탄으로부터 면죄부를 가져다준다. '지금 너의 행동, 조금 사치스러운데? 보통 사람은 힘들게 사는데, 그렇게 놀고먹는 것 보니 있는 집 자식인가 본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저는 타당하게 가난합니다. 착실하게 살아왔지만 삶을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아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저러한 가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가난을 증명하고 때로는 고통을 과장하여 내가 거쳐온 삶의 서사를 수차례 첨삭해야지만 발언권을 얻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는 사람이 눈꼴시려워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그런 점에서는 증명할 것이 차고 넘치는 가난의 부자다. 가난하지만 아예 말도 안 되게 가난해서 주제넘게 사치했다는 말은 듣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가난하다. 평생 내가 가진 불행과 편견을 적절하게 이용해 값싼 동정표를 얻어 왔기에 이 분야라면 자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싫다. 사람들이 나를 있는 집 자식이라고 판단하고 욕할 때마다 “아니에요 사실 저 되게 가난해요!”라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는 삶은 조금 슬프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아하지 않다.


철학자 고병권의 책 <묵묵>에는 “감히 해외여행을 떠난 기초생활수급자를 위하여”라는 챕터가 나온다. 대중들은 유독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분노한다. 해외여행을 떠날 정도면 대상자가 아닌 것 아니냐, 감히 나도 못 간 해외여행을 내 세금을 받는 당신이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기초생활수급권은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이고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그 능력이 없는 경우 법적으로 주어지는 권리이지 해외여행 유무로 갈리는 것이 아니다. 저소득층은 해외여행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빈자에게 부여된 권리의 마지노선이 겨우 생존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져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취향의 향유와 인간다운 삶은 모든 개인의 권리다. 가난한 사람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우아하게 모나리자를 보고 싶을 수 있다.


그가 그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준 돈을 밥 먹는데만 쓰든, 책을 사보든, 여행을 하든, 자기의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그 권리자가 정할 문제라는 말이다. 밥 먹지 않는 곳에 쓰면 ‘어 먹고살 만한가 보지?’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먹는 동물’로서만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

 - 고병권 <묵묵>


퇴사하고 긴 여행을 갔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못하는 선택이라며 욕한다. 그런데 정말 기초생활수급자가 해외여행을 가면 나랏 녹으로 주제넘게 사치한다고 욕한다. 그런데 이렇게 빈자들에 대한 마녀사냥과 흙수저 고백이 반복되는 사이, 부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들은 탈세하고 해외여행을 간 부자보다 내 세금으로 해외여행을 갔다는 기초생활소득자에게 더 분노한다. 빈자와 부자가 누려야 할 것이 나뉘어 있다는 시선, 가난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시각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의 기본권을 좁힌다. 둘 다 똑같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당연히 돈이 많으면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제한된 형편 안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우아함을 누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버거운 일상에서 나름 투쟁하며 어떤 것은 포기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각자의 아름다움만은 기필코 쟁취해낸다. 기초생활수급자가 해외여행을 가고, 저소득층 학생이 브랜드 롱패딩을 입고 싶은 욕구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빚이 많아도 일 년씩 해외를 떠돌며 갭이어를 가질 수 있다. 그건 그 사람이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삶의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가난한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가 있다는 편견은 단순히 그의 좁은 식견 때문에 슬픈 것만은 아니다. "있는 집 자식이나 세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고는 본인의 삶도 그런 방식으로 좁게 만든다는 점에서 슬프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의 사례를 특수한 개천용 사례로 간주하지 말고,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는 케이스 스터디의 하나로 여기는 게 좋지 않을까? 가난의 랭킹을 매기지 않고도, 대부분의 사람이 원할 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수준의 최저임금이 보장하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나의 가난을 내가 원할 때 말하고 싶다. 욕먹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가난하다는 사실을 구구절절하게 증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학자금을 간신히 갚고, 모은 돈도 없이 무모하게 여행을 떠났지만 이런 흙수저 고백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퇴사하고 갭이어를 가진 사람”이란 꼬리표를 얻는 것은 더더욱 싫다. 나는 어쩌다 가난할 뿐이지 가난함이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우아하게 가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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