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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May 17. 2023

에드워드 호퍼 展 - 길 위에서

무관심으로 흘려버리는 평범한 것에 머문 시선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한 것"


호퍼의 표현처럼 과묵한 그에게 그림은 세상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화법이었다. 호퍼의 시선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무관심으로 흘려버리는 평범한 것"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대상과 공간을 세심히 관찰해서 포착한 현실을 호퍼는 자신만의 빛과 그림자, 대담한 구도, 시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자기화했다. 그의 작품 앞에서 타자화된 기분으로 그의 작품을 응시했다. 묘한 경험이었다, 신선했고 꽤 흥미로웠다. 그래, 호퍼는 이런 식으로 관람하면 되는 거야.


어느 작품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림 속 풍경 안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공간을 걷고, 그곳의 냄새를 맡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작품 앞에 오래 머물 때 가능한 경험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사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당신도 잘 알겠지요.    by 호퍼


"물론이죠. 호퍼 씨. 잘 알다마다요. 여행지에서 그런 경험을 자주 하곤 한답니다. "

호퍼만의 감수성과 섬세한 관찰로 상상력이 더해진 화풍 앞에 서노라면 그가 평생에 걸쳐 발전시킨 성취가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많은 관객 속에 묻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텅 빈 전시실, 호퍼의 작품 앞에서 내 마음에 오래 머문 몇 작품 앞에서 독대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작가와 친구가 될 것 같은 느낌? 작품 속 고독한 영혼이 나인 양, 너인 양, 호퍼인 양, 조세핀인 양. 나는 내가 아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호퍼의 작품을 보면서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를 흔든 작품 몇 개를 소개하면? 파리 여행 중 작업한 작품 푸른 저녁 속 피에로가 호퍼 자신이라는 걸 알고, 이 작품이 더 슬퍼 보였다. 다큐를 통해 이 작품 배경지식을 알고 관람하면 작품과 더 진지하게 소통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일대, 케이프코드 등 작품 속에 작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를 따라, 도시의 일상에서 자연으로 회귀를 거듭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혀간 호퍼의 65년에 이르는 화업을 돌아보는 전시회다.


전시 제목 '길 위에서'는 호퍼가 작품 속 장소로 향하는 길이다.

관객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여러 도시를 함께 여행하게 될 것이다. 길 위, 바로 그곳을 재현한 전시장에서 호퍼 다운 화법을 만나고, 그 길 위에서 호퍼를 조우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예술에서 '삶'이란 단어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삶에는 존재의 전부가 함축되어 있고 예술은 삶에 반응해야 하지 삶을 꺼려서는 안 된다.    by 호퍼


1882년 뉴욕주 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그림과 문학을 즐기면서 성장한다. 부모의 권유로 실용미술학교에 진학하지만 이듬해 뉴욕 예술 학교로 편입, 20세기 전반 미국 사실주의 화단을 이끈 로버트 헨라이의 수업을 들으며 예술가의 꿈을 키워간다. 역시 부모의 역할은 대단하다.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했던 호퍼는 파리 여행을 가서도 어머니께 편지로 왕래하며 퇴폐적인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 종교인으로서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1,900년 초에는 얼굴과 손에 집중했고, 1910~1920년대의 자화상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 성찰적 측면이 부각된다. 중절모, 에칭 프레스기가 상징물로 등장하며 직업적 자의식이 안팎으로 영감을 얻으며 성장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1940년대에도 자화상과 손 그리기를 반복하며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시도했다.


호퍼는 20세기 초 파리를 세 차례나 여행했다. 다큐멘터리 <호퍼: 아메리칸 러브스토리, 2022>를 통해 호퍼가 프랑스 여성을 흠모했으나 그 여성은 호퍼를 멀리했고, 결혼 소식을 알리며 호퍼에게 큰 상처를 준다. 평생을 그녀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연연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왜일까? 평생의 반려자 조세핀과의 잦은 다툼이 있었고 예술가로서의 동반자 역할로 서로에게 힘이 됐지만 연인으로서의 관계에선 삐거덕 거렸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여성의 모습은 조를 모델로 했다. 겉은 조였으나 내면은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제3의 여성이었을 것 같았다.


다큐 인터뷰에서 조가 남자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는 멘트에서 그녀의 섭섭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래도 호퍼가 떠난 후 그녀 역시 1년 뒤 호퍼의 뒤를 따라간 점, 평생 자녀 없이 지냈지만 그들의 작품이 그들의 자녀였음을. 작품의 소유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 등. 러닝타임 94분 다큐까지 관람하고 나니 호퍼의 작품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다큐 감상 후, 다시 한번 2,3,1 순으로 한차례 더 둘러보며 호퍼의 세계를 깊이 이해해 보려고 했다.


위싱턴 스퀘어 주변에 작업실이 있었고, 자주 워싱턴 스퀘어를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거나 조세핀과 대화 나누는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에칭을 시작한 뒤부터 내 그림은 구체화되어 가는 듯했다.   by 호퍼


뉴욕의 주택가와 고층 건물, 북적이는 번화가의 풍경, 고가 전철과 철도, 도시를 밝히는 불빛과 텅 빈 거리, 실내의 인물 등은 에칭의 주된 주제였다. 이런 작업은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연구하고 이후 회화 작업과 연결되는 주제 선정, 구도, 표현법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에칭은 화단의 호평을 받으며 예술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트사이드 실내, 1922年作> 우: <에칭 프레스가 있는 스튜디오의 에드워드 호퍼, 1947年경>

1916년 에칭 프레스를 구입한 뒤로 1928년까지 뉴욕의 면면을 담은 70점의 판화를 제작했다. 개인적으로 에칭 작품 들을 보며 호퍼만의 감각이 강조된 겹쳐진 선들 앞에서 감탄을 자아냈다. 작품의 규모는 작았지만 그 속에서 용솟음치는 기운을 느꼈던 건 나뿐일까? 암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에칭 전시관을 돌아보았을 정도로 에칭 작품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와이오밍의 조, 1946年作> & 에드워드 호퍼, 조세핀 호퍼 <작가의 장부>

호퍼의 훌륭한 조력자였던 조는 성격 차로 다툼이 잦았지만 문학, 영화, 연극, 프랑스에 대한 애정 등의 취향을 공유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여러 곳으로 여행을 떠나 함께 야외 작업을 즐겼다.


조세핀은 과묵한 호퍼와 달리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예술 딜러, 컬렉터, 큐레이터 및 기자들과 교류하며 남편의 작품을 홍보했다. 조는 조의 전시 이력, 작품 판매 등 상세한 정보가 적힌 장부 관리를 30년 이상 지속하는 등 매니저의 역할도 수행했고, 남편의 사망 이후 거의 2,500여 점에 달하는 호퍼의 작품과 자료 일체를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녀가 세세하게 기록한 덕분에 장부는 그의 작품 생애에 대한 핵심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2017년 봄, 뉴욕을 여행했을 때 휘트니 미술관에서 호퍼의 작품을 꽤 많이 관람할 수 있었다. 그때 관람했던 유명 작품들처럼 익히 알고 있는 호퍼의 작품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파리,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를 여행하며 그린 작품들이 이번 길 위에서 展에서는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튼 러닝타임 94분 다큐멘터리 관람까지 총 4시간이 소요된 호퍼전은 만족스러웠다.


5월 초의 녹음이 정말 아름답다, 정동길 입구에 새로 생긴 듯한 카페 덕수궁에서 커피 한 잔 마시려고 계획했었는데 일찍 문을 닫는 모양이었다. 낮에 그 앞을 지날 땐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주문하던데. 아쉬웠다.


미술관 전시 둘러보기 좋은 계절이다. 버스를 내려 정동길을 따라 시립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을 좋아한다. 그때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타임머신 타고 20세기 후반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같은 공간 정동길을 걷지만 나는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에 있다. 그 기분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정동길이 그래서 나는 좋다.


역시 서울시에서 하는 전시라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던 호퍼 전도 좋았다. 얼리버드 예매를 해 둔 것은 잘한 일이다. 8월까지라고 너무 느긋하게 여유 부리지 마시고 시간 내서 미리 다녀올 것을 권유한다.


1층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고, 2층과 3층은 금지되어 있다. 호퍼의 작품은 모두 네이버 이미지에서 가져왔고 일부는 직접 촬영했음을 밝혀둔다.


아래 작품은 마음에 오래 머문 작품들이다.

1층에 전시된 <햇빛 속의 여인, 1961年作> 만 직접 찍은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네이버 이미지에서 가져왔다.

좌: <햇빛 속의 여인, 1961年作>  우: <푸른 저녁, 1914年作> 
좌: <철길의 석양, 1929年作> 우: <밤의 창문, 1928年作>                                 
좌: <자화상, 1925~30年作> 우:  <오전 7시, 1948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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