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릴 때 그냥 후딱 내가 도와 주고 싶을 때가 많았다.
옷을 뒤집어 입고 있으면 얼른 가서 바로잡아 주고 싶었고,
신발을 좌우 거꾸로 신고 있어도 얼른 가서 바로잡아 주고 싶었으며,
옷의 단추를 하나 끼우는 데 5분씩 걸리는 걸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처음 다니게 되었을 때 인상 깊었던 일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4살 아이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다.
"하늘아, 이제 신발도 혼자 신을 수 있지?"
아이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낑낑대면서 한참만에 결국 혼자 신발을 신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고 지켜보시는 동안 나도 함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날부터였다.
내가 주려고 하는 것이 진짜 도움인가, 하고 돌아보게 된 것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엄마가 왜 그래?"
중2 였던 아이가 어느 날 했던 말이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상대는 도와 준다는데 참견으로 느껴질 때가 없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특히 부모의 도움이 그랬다. ㅎㅎㅎ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도, 다른 이들도
도움을 주겠다는 의도는 명확하나
그것이 어떤 선을 넘으면
참견이 되어 버릴 때가 있다.
역할의 침해가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도우려 할 때는,
전제가 되고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다.
협력의 출발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단 자기 일을 잘 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를 돕는다는 건
내가 내 일을 해낸 것을 전제로 한다.
자기의 일을 해내지 못하고 다른 이를 도우면
모두가 협력해 완성해가는 작품에
자기가 맡은 부분에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자기 역할을 할 때 또 기억해야 할 것도 있다.
자기의 일을 할 때
전체의 방향과 시선 속에서 하는 것이다.
전체의 완성 작품 또는 일의 끝을 보면서
전체의 일부를 해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의,
전체와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일의 또는 역할의 근원적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동료들이 도움을 청할 때 기꺼이 협력할 마음의 준비를 해 두면 된다.
도움이라는 것의 전제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할 때이다.
상대가 원치 않는 도움은
그저 참견이 되기 쉽다.
아이가 엄마의 도움을 거부했던 것처럼.
심지어 아이의 성장을 또는 동료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아이를 아무리 돕고 싶어도
아이의 성장을 위해 직접 해내는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듯이,
동료를 아무리 돕고 싶거나 답답해 보여도
그의 성장을 위해 직접 해내는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 도우려는 의도가 선한 의도이니,
무조건 그게 옳다, 가 아닐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싶다.
도움을 주기 전에
마음에 품을 질문들을 기억해 둔다.
내가 원하는 도움인가,
상대가 원하는 도움인가.
내가 도움이라 생각하는 그것이,
상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명심하려고 한다.
도움과 참견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그리고 많은 경우 나의 결론은 이렇다.
다른 사람들 다 잘 해내고 있다.
나나 잘 하자!!!!
나만 잘 하면 된다!!!
한 소년이 번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비를 지켜보았다. 소년은 가여운 마음에 나비가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번데기의 틈을 벌려주려고 했다. 그때 소년의 아버지가 그를 말렸다. 소년의 '도움' 때문에 나비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나비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번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비의 날개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나 약한 곳에 머무르고, 성장하지 못한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주는 것은, 그를 결코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주1)
이제껏 나에게 최대의 손실을 준 것은 공연한 참견이다(주2)
주1> 보도 섀퍼, <멘탈의 연금술>
주2>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