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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Apr 18. 2022

남편이 큰 아들이라고?

아들이 필요했으면 입양을 했지

결혼 5년차 쯤이었나, 나는 출근하고 남편은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동영상이 온 적이 있다. 뭘까, 하고 열어 보니 우리집을 구석구석 돌며 찍은 동영상이다. ‘이게 뭐지? 이걸 왜 보냈지?’ 생각할 때쯤 남편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 오랜만에 대청소 했지. 짜잔~ 어때? 깨끗하지?


마지막으로 비춘 부엌에는 보리차를 끓이는지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걸 동영상까지 찍어 보내는 요란한(?) 자랑과 독특한 유머에 빵 터졌다. 나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 척 답신을 보냈다.


- 그러게, 집이 깨끗해졌네. 수고했어.

-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왠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문자 뒤에 (으쓱)이라는 의태어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저만 그래요?)

스스로의 행동에 뿌듯함을 느끼는 남편에게 치얼스. 이 때 나는 진짜 감동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남편이 청소를 해서가 아니고 청소를 한 후 ‘칭찬받을 일’을 한 게 아니고 ‘내 할 일을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감동을 했으면 10년도 더 된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여성들이 온통 떠맡고 있는 집안일, 육아 등을 남편이 조금 했을 때 자꾸 칭찬을 남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제 할 일을 간만에 조금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 매일 하는 밥상 차리기, 설거지 했다고 남편들이 여자를 매일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일은 비일비재하다.

세상은 여자가 할 일, 남자가 할 일을 정해 놓고 여자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욕하고 남자가 그 일을 하면 칭찬한다. 뭔가 잘못되었다.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한 일은 없다는 게 디폴트값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가에 갈 때마다  설거지를 하는데, 설거지 했다고 칭찬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인식되어 있는 일은, 하면 칭찬받는 게 아니라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남편은 처가에서 어쩌다 한 번 설거지해도 폭풍 칭찬을 받는다. 왜냐. 이건 남자가 할 당연한 일로 인식되어 있지 않아 특별히 칭찬받아 마땅한 잘한 일이 된 거다. 아이 어린 시절, 나는 아이와 음식점에 가면 하나 시켜 둘이 먹는다고 눈치줄까 걱정했는데, 남편이 아이와 음식점에 둘이 갔을 땐, 식당 아주머니들이 기특해하고 안쓰러워 하며 밥 하나 시켜 먹어도 공짜로 계란프라이도 줬다 들었다.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자상하다고 칭찬하며 저 멀리 북유럽의 별명을 들여와 '라떼파파'라고 하는데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너무 쉽게 ‘맘충'이 된다.


세상은 대체로 여자에게 가혹하고 남자에게 관대하다. 어릴 때부터 그렇다. 남자 아이는 급하면 고추 내놓고 아무데서나 쉬해도, 고놈 고추 귀엽단 소릴 듣는다. 그냥 이건 남자라는 존재 자체를 칭찬하는 말이다. 여자아이에게 언제 어디서도 고놈 잠지 귀엽단 소리 하는 건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너였다, 소리 들은 딸들은 많은 걸로 안다. 나는 남자도 여자도 존재 자체로 칭찬받고 소중하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을 원한다. 학교에서 장난이라도 할라 치면 ‘아유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이해받는다. 여자애들은 ‘여자애가 저렇게 까불어서 어째.’ 소릴 듣는다. 내가 중학교 때 실제로 선생님한테 들은 소리다. 남자가 술 마시고 실수하면 '남자가 사회생활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데, 여자가 같은 행동을 하면 ‘그 여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한다.  


세상에는 여자를 욕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김치녀, 된장녀... 뭔가 여자들에게는 '나쁜' 별명이 참 많다.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도 여자가 하면 ‘특정인’이 아니라 여자 전체에게 욕을 한다. 극소수일 뿐인데도 대다수의 여성이 그렇기라도 하듯 유행어가 된다. 흉악 강력범죄 4종세트(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범죄자의 95%가 남성인데(2019년 통계청, https://blog.naver.com/semastar/222318282261), 세상은 흉악범의 절대 다수인 남성에게 별명을 붙이지 않는다. 이수정 교수는 강력 범죄 피해자의 80%가 여성이라 했다. 통계(https://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2021120169107)가 버젓이 있어도 남자들은 '왜 남자를 예비 범죄자로 보냐'며 억울해 한다. 이 억울함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선일까, 범죄의 대상이 되어 안전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대다수 여성들의 문제가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일일까? 답은 너무 자명한 데 말이다.

몇 년 전 ‘아내 살해’와 ‘남편 살해’ 사건을 비교한 논문(허민숙, "살인과 젠더", 2014)을 본 적 있는데 정말 대단했다. 그 수에서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6배 더 많았다. 아내를 죽인 남성들에게 법정에서 빈번한 문구는 "순간 격분하여", "우발적으로", "술에 취하여"였다. 충동적인 사건이었다거나 술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를 반영해 남성 가해자의 형량을 깎아 주는 일이 다반사다. 이에 비해 여성배우자에게는 이런 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평소 피해자의 폭력에 시달렸다는 점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판단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였다. 평생을 맞고 살다가 생명에 위협을 느껴 자기를 지키려다 살해 상황으로 간 것인데, 정상참작도 없고 정당방위는 단 한 건도 없다. 죽기 전엔 해결되지 않는 아내 폭력사건들… 물론 남자도 여자도 그 누구도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다. 다만 그렇게 법정에서도 여자와 남자를 다르게 다룬다는 거다.

온 세상이 남자를 칭찬하고 여자를 욕한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불공정한 잣대는 거두었으면 좋겠다.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한 일은 세상에 없다. 이제 남자 칭찬은 그만하고 여자 칭찬을 했으면 좋겠다.


오래 전,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최진실이 TV 광고에 나와 대히트를 친 적이 있다.


-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어릴 땐 이게 무슨 소린지 잘 몰랐다. 그런데 남자와 살면서 이게 정말 화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나? 왜 여자 하는 대로만 따라하나? 이 말은 알고 보니 남자들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여자들도 화날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남자가 잘 하면 여자를 칭찬해 주는 말이 아니라, 남자가 못 하면 여자를 욕하려고 만든 말이라고 본다. 남자가 못 하는 건 그 남자 탓이지, 여자 탓이 아니다. 결국 여남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독립적인 주체로 보지 않는 말이어서 나는 저 말이 싫어졌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고 자기 행동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기본값이어야 한다.


‘남자들이 모자라서 그래.’

남자를 아래로 보는 말 같은가? 한국말은 끝까지 봐야 한다. 그래서 결국 남자는 그냥 봐 주자(=봐 줘야지 어쩌겠어?)는 뜻이다. 지금처럼 해도 내버려 두자는 뜻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여자는 자기 할 일도 다 잘 하고 남자까지 훌륭하게 만들어 내야만 겨우 자기 역할을 다 한 게 된다. 모든 책임이 여자에게 씌워진다.


어떤 남자들은 (중략) 그걸 계속 지키지는 않는다. 계속 지키게 하려면 일일이 상기시켜 주고,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잘했다고 치켜세워 줘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상기시켜 주는 일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 임무를 완수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며, 또 그 일을 끝내야 한다고 말해줘야 한다. 반대로 상대방은 이 모든 짐에서 자유롭다.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고 잊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다그치고 칭찬하는 건 자식을 돌볼 때나 하는 일이지 남편하고의 관계에서 할 일이 아니다.                  
- 페어플레이 프로젝트, 이브 로드스키 지음, 김정희 옮김, 메이븐, 60쪽


나는 남편을 아들처럼 돌보지 않고 아들처럼 관계 맺지도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아들이 필요했으면 결혼이 아니라 입양을 했겠지. 큰 아들은 필요 없다.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일방적으로 돌봐야 한다 생각지 않는다. 남편이 무료로 집안일과 육아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 나와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서로 돌봄’, 맞돌봄’이 필요하다. 나에게 남편은 평생의 가장 좋은 베프다. 가장 많이 싸우기도 하지만 인간 관계의 밑바닥까지 가본 끝판왕,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가 성장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가 옳다 믿는 가치가 많이 겹쳐서 자신의 가치있는 삶을 실현해 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 말고 다양한 가족 관계도 모두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실 세상을 사는 데 가족만 필요한 건 아니다. 친구도 필요하고 마을도 필요하고 사회도 필요하다. 많은 돌봄을 마을과 사회와 함께 해 나갔으면 좋겠다.

남편이 이제까지  아들이었다면 ‘독립' 필요한  아닐까.  밖으로 나가 독립하라는  아니라 혼자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정도의 요리, 빨래, 청소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꾸릴  알아야 한다. 가족  누군가에게 돌봄이 필요할  남자도 자기몫을 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있어야 진짜 부부 아닐까. 남편도 애가 아니라 성인이다. 아이처럼 일일이 돌봐 주고 그저  맘대로 해도 된다 하지 말자. (나는 한국 사회가 전세계에서 성폭력 순위권인 이유가 남자에게만 관대한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도 '어른'임을 우리는 조금  믿어줄 필요가 있다. 그걸 굳게 믿은 결과 나는 ‘ 아들말고 좋은 동반자와 살고 있다. (오해는 금물. 안 싸운다는 뜻 아님. 다 나만큼 잘 한다는 뜻 아님.)



* 대문 사진 출처: [카툰] 그녀의 가장 큰 문제는 '큰 아들'인 남편, 북카투니스트뚜루, 베이비뉴스, 20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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