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보여질 뿐이다.

룩 백(Look Back) - 오시야마 키요타카

by 김지민

창작이라는 짝사랑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이 직관적이지 않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례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자신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을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받을 때 자신 또한 곤혹스럽다고 밝힌 바가 있다. 유명 작가의 이러한 자세는 지망생 입장에선 조금 난감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쓰라는 걸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자의 입장에선 특별히 어떤 강의처럼 알려줄 수 있는 소설 쓰기의 방법론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플라톤이 그랬던가. 예술가는 어떤 영감을 받고 쓰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이성을 통해 쓰는 사람이라고. 그럼에도 무책임하게 없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지망생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애매한 상황이다.

때문에 천진한 예술가 지망생들은 명쾌한 방법론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기존 예술가들의 두서없는 말을 들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론들을 듣기만 한다고 해서 작품이 저절로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하지 못할 작동 방식이 숨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왜 만드려고, 창작하려고 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어떠한 것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동기로 그런 행위를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여기에 대해선 어떠한 권위도 필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는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하는 행위들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간에 말이다. 당장이라도 필자는 지금 영화 칼럼을 쓴다(그렇다고 필자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보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써 내려간다. 소소한 자기만족 때문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칼럼을 쓰는 일 이외에도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더군다나 글을 쓰는 행위는 은밀하게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는 욕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칼럼이라는 건 어찌 보면 누군가가 볼 필요도 없는 글이다. 영화 칼럼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직접 보면 되는 일이다. 굳이 영화를 보고 가공된 글을 수고스럽게 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든다. 칼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본다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왜 굳이 누군가의 창작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돈을 내가며 보는 것일까? 특히나 감독들은 영화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리 열심히 찍어대는 것일까?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번거롭게 카메라를 들고, 머리를 싸매며 각본을 쓰는 것일까?

창작은 어쩌면 짝사랑과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 짝사랑을 하는 그 순간만을 향유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룩 백』은 그러한 창작이라는 짝사랑에 보내는 일종의 러브레터다.



Look


모든 것은 ‘보다’라는 행위로부터 파생된 것인지도 모른다. 『룩 백』의 주인공 후지노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학년 신문에 만화를 실을 정도로 만화적 센스가 타고난 후지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만화에 관한 칭찬을 자주 듣는다. 그녀는 그러한 칭찬을 즐기면서도 스스로도 으쓱하는 나머지 자신의 만화에 자부심도 큰 편이다. 하지만 어느 날 학교에도 나오지 않는 쿄모토라는 아이가 학년 신문에 만화를 싣자 그녀의 자존심은 산산조각이 난다. 자기보다 훨씬 그림을 잘 그리는 쿄모토라는 아이의 등장 이후 그녀는 독할 정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주 놀던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어느 곳이든 간에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6학년이 되던 무렵, 본인의 나아진 그림보다 훨씬 더 잘 그린 쿄모토의 그림을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겠다고.


자신이 하던 일에 자신보다 훨씬 더 잘하는 이를 보게 되면 전보다 의욕이 상실되는 경험은 보통의 사람들도 경험하는, 보편적 경험이 아닐까. 더군다나 창작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이들에게 동경을 느끼면서도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작중에 초등학생인 후지노는 어린 마음에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 낙담한다. 하지만 그녀도 그녀 나름의 방향을 찾으려고 한다. 만화를 그만두고 다시 친구들과 놀기 시작하고, 운동에 더 관심이 있던 그녀는 가라테를 다닌다.

그러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고 난 후 선생님의 부탁으로 후지노는 쿄모토의 졸업장을 전달하게 된다. 쿄모토의 집에 들어간 후지노는 그녀의 방 앞에 쌓여 있는 스케치북들을 보게 된다. 자신보다 훨씬 잘 그리던 쿄모토도 후지노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노력을 하던 것이다. 게다가 쿄모토의 방 앞에 쌓인 스케치북들은 후지노보다 상당한 양의 스케치북 더미들이었다.


후지노는 노트 더미 속에서 정확히 만화 네 컷이 나뉜 종이를 발견한다. 후지노는 무심코 그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 쿄모토가 집에서 나오지 않으며 해골이 된 채 히키코모리 대회에 우승한다는 내용의 만화였다. 그녀는 만화를 그리고 난 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자책하던 중 그 순간 종이를 놓쳐버린다. 종이는 우연히 쿄모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당황한 후지노는 졸업장을 두고 집에서 나온다. 동시에 쿄모토는 후지노의 만화를 보고 후지노의 만화임을 알아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후지노를 찾아간 쿄모토는 흥분한 채 후지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싸인을 부탁한다.


Back

만화를 그만두었던 후지노는 쿄모토가 자신의 작품에 보낸 진심 어린 애정 덕분에 다시금 만화를 그리게 된다. 후지노는 사실 만화 그리는 일을 지루한 일이라 생각한다. 쿄모토는 그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리지만 후지노는 뚜렷한 애정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둘은 결국에 서로의 길로 갈라진다. 쿄모토는 그림을 더 배우고 싶어 미대로 가게 되고, 후지노는 당선된 만화를 연재하기 위해 만화가의 길을 걷는다.


인기 만화가가 된 후지노는 어느 날 한 미대의 살인 사건에 대해 듣는다. 살인적인 마감 스케줄에 쫓기는 채로 만화를 그리던 그녀는 초췌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다 이만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걸려오는 전화. 불길한 예감의 전조는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쿄모토는 살인 사건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고 후지노는 그녀의 장례식장에 간다. 연재하던 만화는 중단하고 그녀는 어딘가 의욕을 잃어버린 채로 쿄모토의 방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자책한다. 그때 쿄모토를 방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결국 쿄모토를 죽인 건 아닐까. 쿄모토는 결국 자신의 방 안에서만 있었다면 만화를 그리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도 만화를 그리지 않고 가라테로 넘어갔을 텐데. 쿄모토가 그 사건에 닿기도 전에 내가 그 살인마를 제압했더라면 쿄모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상상의 끝에 가닿는 순간,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에 들어간다. 그녀가 싸인해준 쿄모토의 옷. 그녀가 연재하던 만화인 『샤크 킥』의 단행본이 그녀의 방 안에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쿄모토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어났을 다행스러운 일들에 대해 상상했지만, 쿄모토의 방 안을 들어온 뒤로부터 그녀와 함께 만화를 그렸던 추억을 떠올린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뒤로부터는 어떠한 흔적들이 있었기에 그녀를 그토록 절실하게 만들었을까. 쿄모토는 후지노에게 묻는다.

“그럼 후지노는 왜 계속 그리는 거야?”


만화 그리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이라 생각하는 그녀가 끝까지 만화를 그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관성에 따라 그녀는 펜을 들었던 것일까. 공모전에 만화를 내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쿄모토와 만화를 그리던 그녀는 어째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걸까. 스크린에서 설명되지 않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후지노를 응원해 주던 유일한 한 사람, 그녀의 동기가 된 한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신기하게도 어떤 고달픈 일이라도 하게 된다. 물론 단지 그 일이 주는 즐거움에 의해서 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느껴줬으면 하는 마음에 단숨에 움직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다른 타자가 나를 믿어준다면, 그만큼 강력한 일이 있을까.

후지노는 만화 네 컷 종이를 작업실로 가져온다. 종이에는 칸만 나뉘어 있을 뿐 그 안에는 비어 있다. 그녀는 작업실 창에 그 종이를 붙이곤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 만화를 그린다.



아 소제목 뭐로 하지


창작은 고된 일이다. 한 화가가 매 순간 즐겁다는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보단 우리는 화가가 붓을 부러뜨리거나, 이젤을 던지거나 하는 식으로 창작의 고통을 느끼는 장면을 더 익숙하게 생각한다. 글을 쓰는 작가들도 그렇다. 화가만큼 격하진 않지만 타자기 앞이나 종이 앞에서 고뇌하는 장면들이 익숙하게 지나간다.

『룩 백』의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는 이 작품이 자신의 경험에서 기초했음을 밝힌다. 그는 한 글에서 미대에 입학한 자신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감에 빠졌었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회의감의 배경에는 당시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지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이 하는 창작의 의미가 무엇이 있을까.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그는 무언가 도움이라도 돼보자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그 활동에서 그는 한층 더 깊어진 무력감을 목도한다. 흙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중에 후지모토 타츠키를 포함한 대학생들은 도랑에 있는 모든 흙을 나르지 못한다. 함께 작업했던 학생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저희가 온 의미가 없었네요.”

그는 그 뒤로도 자원봉사를 한 번 더 갔지만 그 이후로는 가지 않는다. 유화를 그리느라 돈이 들어서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그는 그 무력감을 기억한 채로, 몇몇 슬픈 사건들이 벌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채로 그 감정들을 모아 온다. 『룩 백』은 그러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작가 또한 후지노와 마찬가지로 친구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돌아보았고,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되었다고 회고한다.

우리가 어떤 창작 활동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알아주지도 못할 것들에 대해 기를 쓰며 힘을 쏟아낼 때가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이런 창작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는, 이런 수고스럽고 번거로운 작업의 이유는 다름 아닌 짝사랑과도 같은 이유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순간만을 향유하는 상태에서 창작은 이어진다. 만약 쿄모토와 같은 조력자가 있었다면 그 사람이 창작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서 이 행위가 갖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기도 한다. 이 미비하고 가엾은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공허한 행동이 아닐까. 후지모토 타츠키의 경험은 의미 상실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룩 백』은 보편적인 창작 행위에 보내는 러브레터였지만, 이 작품의 근본적인 동기는 한 개인의 창작 행위의 연약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후지모토 타츠키는 작품을 그려냈다. 창작의 연약함을 창작으로 다시 덧씌운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글이 어떤 상황을 재현하고, 더 명료한 의의를 얻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사실 허구적인 픽션에 의해 더욱 명료해질 때도 있다는 것을 종종 잊는 것 같다. 『룩 백』은 그러한 픽션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