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기행

나를 찾으러 떠난 1박 2일의 여정 속에서

by 찬스

새벽 4시.

10년 만에 가게 되는 '나 홀로 여행' 출발일에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즐겨보는 여행 유튜버가 올려준 영상을 차례대로 보면서 여행 컨셉을 고민하고, 필수 경유지인 목포 주변에 갈 곳이 어디 있나 살펴본다. 대충 가 볼 법한 장소를 추린 뒤 침대에 누운 시각이 새벽 4시다. 벌레 우는 소리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시각. 모든 가족이 잠들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각이다. ‘잠은 죽어서 실컷 자지.’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아내가 여행 가는 날 아침으로 샌드위치 먹고 가라고 새벽배송 음식을 주문했다. 아침 7시쯤 냉동식품도 있으니 문 밖에 있는 상품을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잠이 덜 깼지만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상품을 옮긴다. 아이들이 깨면 엄마의 육아시간이 길어질 테니깐, 아빠 어디 가냐고 울지도 모르니깐. 조금 더 누워있다 옷 2벌에 샌드위치와 제일 작은 우유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이번 여행은 원래 일상에 갇혀 사는 내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아내에게 포상휴가 보내달라고 억지를 부려 받은 여행이다. 울릉도가 1순위였지만 2박 3일 안에 못 다녀올 것 같았다. 차순위로 구름만 없으면 별천지가 된다는 청산도에 꽂혀 밤에 별구경 실컷 하고, 낚시도 하고, 바다 수영도 하다가 올라올 계획이었다. 2주 전 코로나에 걸리기 전까지는. 6일 동안 독박 육아한 아내에게 나는 그저 죄인일 뿐. 그래도 아내는 섬에 들어가지 않는 조건으로 쿨하게 1박 2일을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했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Yammy Yammy를 외치며 가방에서 우유를 꺼낸다. 응? 왜 우유가 가벼워졌지? 오호! 우유가 새것이 아니다. 뜯었다가 다시 닫아놓은 상태다. 가방에 있는 옷을 서둘러 꺼내본다. 잘 때 입으려고 가져온 반팔티가 우유에 젖었다. 다행히 나머지 1벌은 우유가 묻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 어제 본 빠니보틀과 노홍철의 영상이 떠 올랐다. 노홍철은 항상 본인을 럭키가이라고 외친다. 무한도전을 할 때부터 항상 긍정적이고 뭔가 운이 좋았다. 노홍철이 운이 안 좋은 순간은 정말 없나 싶어 불운한 순간만 골라 세어본 적이 있다. 당연히 불운한 순간이 있음에도 외친다. A-yo 럭키가이!! 그래서 나도 외친다. “아직 옷 한 벌 남았다!!!” 정말 화도 안 나고 짜증도 안 나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목적지는 저녁 6시쯤 목표에서 진탁, 슬범이형, 애름이를 만나기로 해서 그 부근 장성의 백양사를 찍고 간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곳 있으면 도중에 차 세워야지.’라는 P 스타일의 계획으로 주변 경치를 구경한다. 익산쯤 오니 동완이가 생각나서 전화하고 미륵사지 석탑을 보고 갈까 하다 익산 ic를 지나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될 거 같아 계속 달린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무성서원’ 간판이 크게 들어온다. 무성서원 들어본 적도 없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못 참지! 목적지를 바꾼다.


고속도로에서 본 ‘무성서원’이라는 간판의 크기가 무색할 만큼 아담했다. 내가 여러분을 대신해 여기에 갔으니 굳이 안 가셔도 된다. 무성서원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니라 서원의 문화적 유산을 인정받아 9개의 서원이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공부하는 곳인 강학의 장소가 인상 깊은데 앞뒤로 벽이 뚫려 있는 것이 막힘없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을 것 같고, 천장에는 여러 글이 적힌 나무판이 있어 당시에도 교실환경미화는 존재했구나라는 동질감이 생긴다.


배롱나무가 이쁘게 핀 무성서원의 기숙사 공간


한 번도 가지 않은 길, 앞으로도 갈 일이 없는 길. 그래서 추억에 남을 길.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장성군 백양사지만 빠른 길보다 일부러 시골길을 따라 운전한다. 칠보면에 차를 세워 동진강에 반영된 나무와 하늘 사진을 찍는다. 봉우리를 건너기 위해 구불구불한 구절제를 지나다 마주친 배롱나무에서 아내와의 경주 여행이 홍자색 꽃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초록색 풍경. 모든 시야가 푸르다. 참을 수 없다. 티맵은 앞으로 가라고 하지만 차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강 위 다리를 걸으며 사방으로 펼쳐진 초록색 풍경에 나의 감성을 채우고, 영화 ‘박하사탕’에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데 아뿔싸 용량이 다 찼단다. 감수성을 극대치로 만든 절정의 장면을 카메라로 온전히 담지 못해 아쉽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나? 미리 확인 안 한 나를 탓해야지.


KakaoTalk_20220802_225821905.jpg 모든 곳이 푸르기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달리는 이 길이 오늘 몇 명을 만날까? 열명이라도 만날까? 아니 만약에 내가 오늘 첫 번째로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마치 탐험가처럼 외로운 길, 잊혀진 길, 숨겨진 길을 찾은 것 같아 짜릿한 기분이 든다. 김춘수의 꽃처럼 나로 인해 이 길이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리고 운전하다 보이는 저 출렁다리는 나에게 더욱더 강렬한 메시지를 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에게 얼른 오세요.’ 벌써 정오가 지났지만 내가 오늘 첫 번째로 출렁다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면 백양사가 목적지가 아니라 바로 저곳이 나의 목적지다.


KakaoTalk_20220802_225540264_02.jpg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구절초 테마공원 출렁다리

괜히 걱정이 생긴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이 출렁다리가 만약에 안전상의 문제로 아무도 찾지 않는 거라면? 아니 미완성이라서 건설 중에 있는 거라면? 최대한 살살 밟는데도 위아래가 요동친다. 공포가 찾아온다. 만약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수심이 얕아서 두 다리는 내어줘야 한다. 심지어 다리 가운데는 아래가 보이도록 쇠 철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후달린다. 멈춰서 본다. 바람이 분다. 가만히 서 있어도 다리가 흔들린다. 무섭다. 어찌어찌 용기 내 맞은편까지 건넌다. 그리고 나서야 이 장소에 맞게 구절초 그림이 보인다. 바로 이곳은 구절초 테마공원이라는 곳인데 산과 계곡과 소나무가 너무 예쁘게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테마공원의 동산을 오르니 조경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 두 분이 미소를 지어주셔서 먼저 인사를 드리니 어디서 왔는지, 왜 지금 왔는지 물어보신다. 여기는 10월이 되면 온 천지가 구절초와 꽃으로 장관을 이루어 전국 각지에서 구경하러 온다고 알려주신다. 10월뿐만 아니라 여름 피서로 와도 너무 좋을 것 같은 이곳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고, 가족들과 한 번 더 오고 싶은 곳이다. 참고로 출렁다리는 3번 건너니깐 껌이더라.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나? 처음이 어렵지.


샌드위치만 먹어서 허기가 지지만 점심을 뒤로하고 처음 목적지인 백양사와 쌍계루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쯤. 국립공원답게 비자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향과 압도적인 백학봉의 위세를 느끼며 자연을 만끽하지만 당이 떨어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볍게 1시간 반 정도 둘러보고 친구들을 보기로 한 목포로 이동한다. 갑자기 들렸던 이전 장소들이 너무 좋았던 걸까? 아니면 배가 고팠던 걸까? 아니면 이제는 혼자 여행 반나절만에 외로워졌던 걸까? 상황이 어찌 되었든 여행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이제 운전은 오늘 끝이다! 생각하며 목포의 평화광장 주변 모텔에서 약속시간까지 재충전을 한다.


KakaoTalk_20220802_225540264_03.jpg 백양사 뒤의 백학봉의 위세가 압도적이다.


진탁이. 이번 여행을 완성시켜준 친구. 혼자 여행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여럿 여행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함께 여행한다면 재미있고 편한 여행이 될 것 같은 친구. 자기의 주장도 잘 표현하고, 체력도 좋고, 잘 웃는다. 재밌는 이야기에 깔깔 웃는 진탁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애름이. 대학생 때 함께 학생회를 하면서 친해진 친구. 모든 일에 진심이고 친구의 일도 자기 일처럼 웃어주고 눈물을 흘려주는 정 많은 친구다. 내일 출근임에도 광주에서 목포까지 와준 의리녀! 풍류를 알아서 술자리를 즐기고 춤에 조예가 깊다. 도서관 앞 김혜자 마더 춤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다.

슬범이형. 사람을 좋아하고 트렌드를 선도해가는 유쾌한 형. 같은 심화, 반, 운동 모임 후배도 아닌데 청주 시절 맛있는 식당만 골라서 데려가 사주신 고마운 형. 옛날에 술 마시다가 ‘병찬아 말 편하게 해~‘라는 말을 듣고 친구 사귐에 있어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닮고 싶다.


KakaoTalk_20220802_225540264_04.jpg 나의 여행을 완성시켜준 사람들.


다음 날 여행 계획은 강진이었다. 한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넓다는 녹차밭 설록다원과 호남의 3대 정원 중 하나인 백운동 정원을 들린 후, 요즘 핫한 가우도에서 집라인도 타고 카페 벙커에서 떨어지는 낙조를 보며 멍을 때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살면서 강진에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기에 매우 기대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장소에만 가는 것이 여행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여행의 진수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이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인생관을 듣고 나를 되돌아보는 것 자체가 굉장한 힘을 준다. 이번 여행은 그이가 바로 15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라니.


사실 소맥을 마시면 무조건 취하기에 한 주종만 마시고 싶었지만 흥 넘치는 슬범이형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다. PT 받는 중이라 맥주 한 잔을 가지고 5번이나 짠하는 애름이가 밉지 않고 건배 제의가 반갑다. 그날 모임 후 새벽 2시까지 카페인에 잠을 설쳤다는 진탁이가 듬직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술에 취해 4초에 한 번씩 ’ 1월에 청주와!‘를 외쳤고 장렬히 전사하여 다음날 10시 반까지 숙소에 누워있어야 했다.

강진을 못가 아쉽냐고? 전혀 아쉽지 않다. 하루 종일 새로운 곳에 가서 장소 여행을 떠났다면 밤과 다음날 점심에는 친구 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장소가 나에게 주는 영감만큼이나 반가운 사람들과의 추억은 또 다른 장소에서 그들과 함께 회자되리라.


아빠와 남편의 자리를 잠시 내려놓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다음 날 속이 쓰려하면서도 가족 생각이 나더라. 새로운 장소에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보고 싶은 감정은 가족의 크기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소중한 1박 2일이지만 꽉 채우지 않고 서둘러 저녁이 되기 전 귀가를 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사람 여행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친구를 만난 것도 너무 좋고, 구절초 테마공원에서 할머니랑 나눈 대화도 생각보다 여운이 오래간다.


이 글을 읽는 소중한 나의 인연, 여러분들도 떠나세요. 그리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보세요. 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래된 친구도 꼭 만나보세요. 나는 나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보다 친구의 관심과 관계 속에서 더 풍성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