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보고서

안식의 물가에서

by 이런아란


어휴, 좋다. 습하고 더운 날씨를 피해 습하고 더운 목욕탕이라니. 어휴, 시원하다. 뜨거운 탕 속에서 땀을 흘리며 시원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어른이 되었다. 평일 낮 여탕에는 다 큰 어른과 더 늙은 어른 뿐이다. 젊은 축들은 아이 등교시키자 바로 왔다가 머리를 공들여 말리고 유행하는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곤 브런치 까페로 떠났다.


활짝 깬 도시가 흥을 못 이겨 숫제 껑충거리는 이 시간. 온탕 옆에서 제 무릎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뱃살이 늘어지고 머리 숱이 성성한 할매 뿐. 그네에게 목욕탕은 더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경유지, 대기실이 아니다. 오늘의, 또는 이번 주의, 또는 이번 달의 작심한 목적지다. 그래서인가. 저토록 진중하게 몸을 불리는 것은.


귀걸이 한 쌍 차지 않은 맨몸. 눈썹 한 줄 긋지 않은 맨 얼굴. 어미 늑대마냥 처진 가슴 덜렁거리는, 중력에 닳은 몸, 알짜를 내준 몸. 새끼를 길러낸 암컷의 몸. 그냥 보아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도 없다. 한 개를 뺏기고 한 개를 뺏느라 서로 억척을 부려왔을 테지만 이제 와 벗고 앉으니 모두가 하나의 물상이다. 다 합쳐도, 따로 보아도 그저 한 덩어리의, 체취 있는 뼈와 살. 엄마, 아내, 딸, 여자라는 개체. 동일한 생장을 거치고 대동소이한 역사를 지닌 자연계의 한 부류.


분홍이 얼룩이 점박이 아기 돼지 열 두 마리보다도 변별점이 없는 그들 사이에 함께 섞여 있으니 나는 본능적으로 안도한다. 포식자도 경쟁자도 없는 물가에서 우리는 평화를 만끽한다. 그리고 어쩐지 연민한다. 내가 느낀 그 피로를 너도 겪은 것이 안쓰럽고, 내가 느낀 그 불안을 너도 한 고비 넘겨야 할 것이 서글프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난폭한 경기를 끝내고 서로 끌어안다가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된 채 짐승처럼 울부짖는 사내에게도 이처럼 같은 숙명을 연민하는 마음이 치솟았을 것이다. 그 순간은 챔피언 벨트를 가진 자도 잃은 자도, 그 지독한 훈련과 압박감을 지켜보거나 짐작하는 자들도 함께 운다. 어쩌면 무리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방식이리라. 또한 계속해서 정직하고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할 테고.


누군가 묵묵히 때를 민다. 성을 쌓듯 서두르지 않는다. 건너뛰지 않고 치중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익숙한 놀림. 실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건만 그의 등 한가운데 허점이 남았다. 노쇠한 어깨를 돌려 팔을 위에서 뻗어도 아래에서 올려도 닿지 않는 곳. 손을 바꾸어보아도 마찬가지다. 목덜미며 복사뼈까지 온몸이 때 타올에 벌겋게 쓸린 탓에 손바닥만한 미점령지가 더욱 해쓱해 보인다. 반송된 채 바래버린 편지 봉투 같다.


편지의 수취인은 누구였을까. 가까이 살았더라면 함께 왔을 며느리일까. 한참 일하고 있을 딸? 언제부터 얼굴도 보기 힘든 큰손녀일까. 요양병원에 들어간 동네 친구, 또는 겨우 눈인사나 하고 지내는 이웃일까. 세월이 길었거나 마음이 엇갈려, 사는 게 고되거나 인정이 예전 같지 못해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늙은 여자의 편지 부치는 방식이 잘못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제는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도. 어쩌면 그저 오늘만 이렇게 된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할머니, 제가 등 좀 밀어 드릴게요


나는 결국 내 성미에 봉투를 열고 말았다. 그깟 편지, 쓴 사람만 괜찮다면야 누가 열어보면 어떤가. 나는 정성을 다해 편지를 읽는다. 글 대신 온기를 더듬어 읽는다. 다른 곳과 혈색이 맞춰지도록 몸을 더 숙이시라 하여 골고루 문지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몫까지 밀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흰머리처럼 번져가는 내일의 때를 밀어드릴 수는 없다. 도독해진 주름살 사이에 패인 그리움까지 닦아드릴 수는 없다.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몫이다. 세월 앞에 배짱 부리던 시절의 청구서. 나중에 나중에 좋은 날 풀어가리라 미뤄뒀던 엉킨 관계의 이자다. 노쇠한 등에 말간 물 두 바가지를 퍼부어 드리고 나는 서둘러 탕을 나왔다.


요즘은 도통 낮에 목욕 갈 짬이 나지 않는다. 아직 새끼를 덜 길러서, 써야 할 글이 많아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안식의 물가에 앉아 내 몸을 구석구석 바라볼 시간이 없다. 코 앞에 닥친 일들을 해내느라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 같은 가늠은 해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다. 늙어가는 길은 엄마로부터 모의체험 해본다. 엄마처럼 되거나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하다 보면 나만의 길로 조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가면 동족의 생장과 노화를 관찰할 수 있다. 내 주름을 미리 만져볼 수 있는 곳. 천천히 걷고 느리게 말하는 곳. 알몸과 서러움을 벌겋게 드러내 보여도 해치지 않는 곳. 가만히 나를 닦아내는 곳. 약간의 호의만 가지고도 남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곳. 우리에게는 여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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