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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아주다 Jul 04. 2024

언젠가부터 세상이 두 가지로 양분돼 보인다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다

저에게는 이미 써두었지만 발행하지 못한 글들이 몇 있습니다.

공개를 미룬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1) 의식의 흐름대로 쏟아낸 것이 부끄러워서

    2) 그 당시의 힘든 마음이 사실 피해의식일까 봐

    3) 나이가 더 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어렸을 때 맞다고 생각했던 신념도 어떤 경험을 관통하는지에 따라 수도 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4년 전에 썼던 글을 이제 포스팅할 수 있는 이유는, 예일대 정신건강의학과 나종호 교수님의 유퀴즈 영상을 본 것이 방아쇠가 되어서입니다. 아래 영상에서 나종호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저는 영상을 보고, 이제 이 글을 발행해도 ' 생각이 변하지 않겠다'는 어떤 믿음이 생겼습니다.


[00:11:40]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이 신기루 같다"
[00:11:54] "청년들한테 채찍질보다는 위로를 해드리고 싶어요"


사실 이분의 이야기는 팬심으로 구독하는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서도 본 바 있는데요. 한 사람이 쏟아낸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도 인상을 남기고, 누군가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오래 동심원처럼 두르고 있었던 철학이 향기를 내기 때문이겠죠.


그럼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은' 저의 이야기도 시작해 보겠습니다.


썸네일은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대체로 따뜻합니다 :)



아이는 자라 겨우 내가 되었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귀하다. 밥만 잘 먹어도 양말만 잘 신어도 건강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을 받는다. 작고 소중하다. 진부한 얘기지만 어른들도 한때 아이였다. 어느 날 뚝딱 '다 큰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아에서 성인으로, 긴 연속성을 가지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상향의 어른을 향해 각자만의 항해를 하고 있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어른이 되고자 했던 아이는 무수한 경쟁 속에 내던져지며 자기 색깔을 만들어가기도,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에도 부지런해진다. 어렸을 때 '존재만으로' 자격 있음을 부여받았던 귀함, 노력으로 빛났던 순간들, 오를 일만 있던 성장들은, 어른이 되면서 0에 수렴하거나 -를 향해 허우적 되기도 한다. 평균 이상이었던 것들이 평균에 준하거나 그 아래에 머무는 경우도 발생한다. 실패를 교훈 삼아 재기할 수도 있지만 뼈아픔으로 수없이 가라앉을 때도 있다.


나 역시 아이였고, 아이는 자라 겨우 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세상이 두 가지로 양분돼 보인다

언젠가부터 세상이 두 가지로 양분돼 보인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사람과 살아남으려는 사람들. 반대 편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었거나 방향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른 사상이나 정신,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다. 간단히 말하면 "빨리빨리 가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해도 괜찮아"하는 것으로, 두 집단은 등을 지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자본주의, 경쟁사회 VS 철학과 명상, 종교와 힐링
"빨리빨리 가자" VS "천천히 해도 괜찮아"
성장의 말 VS 위로의 말


SNS만 봐도 그렇다. 어떤 기업은 43% 할인, 일잘러를 위한 비법 등을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지겹도록 광고하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우리 제품/우리 서비스'를 소비하라고 불안함을 건드린다. 어떤 그룹은 사상과 철학을 중심으로, 살아남는 방법보다는 힘듦의 이유를 여러 갈래로 나눠 위로하는 말들을 공중에 흘려보낸다.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전자는 자본주의에 잘 속해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후자는 그 편의들을 이용하며 높아지려 했으나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위로한다. 전자는 날쌔고 멋져 보이지만 비열해 보일 때도 있고, 후자는 도덕적이고 근엄하지만 때론 작은 꿈을 꾸고 거기서 만족하라고 하는 것 같아 나약해 보이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이기는 사람이었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브라질 포즈 두 이과수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본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한때는 이기는 쪽의 사람이었다. 성실하기도 했고 필살기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은 이겼기에 어딜 가나 어린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패배들이 쌓여 무너지는 사람도 되었다. 흠집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어렵게 재기해 이기는 방법을 다시 알았을 때는 왜인지 이기는 사람보다는 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기가 받은 시험 점수로 등수를 매겨 내가 원했던 성취를 어느 정도 이루어냈던 학생 때와는 달리, 사회에서는 많은 변수들이 작용했다. 그게 사람이기도 했고, 상황이기도 했다. 상황을 가장한 사람이기도 했다. 곰인지 여우인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뱀처럼 간사하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래도 비둘기처럼 순하게 행동해야 하는지 오래 헤맸다. 예전부터 상황이 압도하는 결과가 많았는데 내 행운이 사회초년생이 되기 전까지 지독하게 작용했는지도.



조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자랐다

열심으로 돈을 버는 일은 내겐 다소 서바이벌 같았다. 사업이 흥해 판이 더 커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여러 사람들이 쏟아져 채용됐고 그때부터 누군가를 견제해야 내가 살 수 있었고, 누군가를 베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조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자랐다. 이긴 사람들은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신명 나게 얘기하고 다녔다. 어떤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떤 것은 다른 이의 시간과 노력이 자기에게 곱절은 덧대진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말하고 자주 반복하는 자에게 함께 만든 트로피는 강화되었다. '어차피 누군가를 희생시킨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테니까. 그 원리를 아니까 잠깐만 뻔뻔하자. 거짓말은 옅어질 테니 한 번만 눈 감자. 지금 하는 말은 진실된 약속이나 곧 거짓이 될 테니 어서 말하고 후엔 모른 척 하자. 불편한 대화에 용기를 가질수록 큰 사람이 되니까, 조금만 참자. 조금만. 나도 힘들잖아. 어쩔 수 없었잖아' 이렇게 열정을 와해시키며 지나가는 일들을 많이 봤다. 일만 열심히 해서는, 일만 할 수 없는 상황이 훨씬 크다는 것을 뒤통수를 만지며 알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인다. 이제 알았으니 처세에 능해져야 한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갓 사회초년생 때는 커리어를 막힘 없이 쌓은 사람들이 멋있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몇 명의 사람들을 놓치고 외면하여 저 자리까지 갔을까?' 하는 서늘한 생각도 올라오는 게 사실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인본주의와 대치되는 경험을 다수 한 후 나 역시 그렇게 변했어야 했는데 내게 이건, 머리 위로 역기를 는 것처럼 힘이 드는 일이었다. 상황에 압도되면 나는 내 몸 하나 일으키는 것도 무거웠다. 그렇게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기대는 수도 없이 꺾였다. 사람은 가까이서 볼수록 실망의 연속이었고 멀리서 볼 때야 빛남의 윤곽이 보였다. 돋보기로 봐도 존경스럽고 망원경으로 봐도 탁월한 사람은, 아예 없거나 정말 소수였던 것 같다. 엘리트 집단, 풀어 얘기해 '우위에 많이 서봤던 집단'은 어떤가? 그들의 '진짜 실력'과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도 실의가 쌓였음은 물론이다. 이제는 이기기 위해 '인간다움'을 조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겐 빛바랜 영광을 안은 인조인간처느껴진다.



나는 그렇게까지 이겨야 할까?

그런데 문득 나는 '그렇게까지' 이겨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까지'를 원하는 일에 붙이면 그렇게까지 정성을 보이는 사람이 되지만 내 생각에 거스르는 일에 붙이면 나를 배반하며 사는 격이 된다. 내가 이기기려 드는 것이 정성을 다하는 건지, 나를 역행하는 건지 생각거리가 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방법으로 이겼는데, 그게 나한테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까? 나한테 맞을까? 그렇게 되면 내가 행복할까? 다른 사람보다 본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뛰어난 게 아니라 누군가를 누르고 올라섰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 나를 보강하는 노력 이외에 남을 다루는 스킬을 배워야 하는 것들에 거부감이 생긴다. 인맥 관리, 사람 처리. 물건에 어울리는 관형사들을 '사람' 앞뒤로 붙는 일이 어색하다.


그런 고민 안에서 나는 텃세도 부리지 않았고, 괴물이 되면서까지 자리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알아서. 상황을 주무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목이 메어 자꾸만 말이 감겼다.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라 나만 잘하면, 나의 책임을 다하면 유기적으로 연결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남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하며 본인 것도 챙기고 있었다. 앞에서나 뒤에서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자기 몫을 보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느 시절의 나처럼 패를 다 보여주는 사람을 발견하면 슬프다. 저 사람이 눈치가 없어서, 상황을 몰라서가 아닐 텐데도, 앞뒷면을 투명하게 꺼내는 모습에 가여움이 올라온다. 속살을 다 드러내고 광장에 나가면 다 뜯기는 걸 알면서, 위험이 있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천성이 그러하여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부대껴하고 겉과 속을 일치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감지하고도 뻔뻔하게 주장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어린 나를 대하듯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다.



기준 자체에 의문을 가지면 다른 궤도로 나아갈 수 있다

그제야 학창 시절, 방황했을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만 했지만, 단지 공부하는 능력으로 줄 세우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빈둥거리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던 친구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지금에서야 '사람은 남들보다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재능이 주어진다'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희망을 키워보는 것처럼, 그 친구들도 어딘가 끼가 있었을 텐데 재능이 공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 체제에 순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부하는 일'에만 욱여넣는 학교에서 뜻 없고 꿈이 없는 사람 눈빛을 하고 다니지 않진 않았을까, 뒤늦게 염려가 올라온다. 역시 상승세를 타는 입장에서는 시류에 타지 못한 이의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결과에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치부하기가 얼마나 간편한지... 이건 이겨보기만 한 사람들은 영영 모르는 맹점이다.


아주 늦게 알았지만 학교 체제에 잘 순응하는 일은 회사원을 양성하기 위한, 가장 평범해지는 지름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일찍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기준 자체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껍질을 깨고 다른 궤도로 나아간다. 져보기도 하고 지지 않아보기도 한 지금에서야 '대학만 잘 가면, 취업만 잘하면'의 최면에서 나는 빠져나오게 됐다. 어릴 적 교육 현장에서는 일탈이 방황이라고 배웠지만 실은 가장 앞서나갈 가능성도 높은  아니었을까? 순응하는 일보다 리스크가 있지만 예방하는 방황인 것이다.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다 조금 빠져나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사람. 빈 공간에서 쉼을 겪었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목표를 잃어버린다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원하는 궤도가 아니기에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하고 싶은 공부가 없는 사람과도 같을 것이다. 아, 어쩌면 사회 시스템이 병난 것이라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응이라는 건 자신과 같은 가치관과 온도로 조율돼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니까.


꽤 모범생이었던 어른들도 가끔, 목표가 없어 빈둥거리는 채로 앉아 있는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야간자율학습실에 던져진다. 취할 수 있는 공부는 자유지만 시간은 속박에 가깝다.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니 말이다. 나도 속박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존재감과 성장의 자취들에 무감각해지곤 했다. 달려가고 싶은 목표를 잃어버렸기에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성실했던 학생이 어른이 돼서 왜 목표를 잃어버렸는가 하니, 양분돼 보이는 두 가지 세상 속에서 내가 속하고 싶은 곳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어디에 속하고 싶은가?

성장과 속도, 위로와 감동.

그 양분돼 보이는 두 가지 세상 속에서, 나는 어쩌면 후자에 속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제를 해결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보다, 바삐 달려가느라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살 희망을 주는 것, 스스로 목표를 정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터칭 하는 것, 현장에서 즉시적인 위로를 전하는 것, 좀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숨 쉴틈을 주는 것. 각자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감동을 선사하는 것. 이런 것들을 해야 '나도 제 자리에 서 있는 느낌이 나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이기는 방법보다 지지 않는 방법을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렇게 변해가야 몸도 아프지 않고 나에게 부끄러울 일도 없을 것이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위로와 감동'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나답게 지내고 싶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사는 이유를 분명히 하며 쓰임과 쓸모를 다하고 싶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었던 걸까?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 나 살자고 다른 사람들 꺼트리는 일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경쟁이 싫은 게 아니라 마음 아파한다. 사안 자체에 열심은 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잘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꺼림칙하다. 사람을 통제하는 일이 매스껍다. 무엇이든 배울 수 있으나 적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론들이 있다.


콘텐츠마다 하나의 메시지를 준다고 믿는다. 넷플릭스의 화제작 <오징어 게임>에서 난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경쟁에서 이긴 자도, 자도 종국에는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최고가 된 사람들은 인간성 결여에도 눈을 조금 감아본 사람이라는 인식이 피어나버렸다. 다시 이 깨달음이 전복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나는 최고가 되고 싶었던 걸까?
최고가 되면 행복할까?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다

내 꿈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만, 결국 나를 살게 하고 살맛 난다고 느끼게 하는 건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멀리 있는 대중에게 전달할 때였다. 당신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언어의 양을 다채롭게 늘렸던 순간들, 존재가 희석된 사람들을 선명하게 해주는 말들, 이심전심(以心傳心) 사람 간 감정이 전이되는 장면들을 만났을 때 내가 하는 일들이 의미 있어진다. 나는 그걸 제일 잘한다는 걸 알고 있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그래, 나는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이란 노래의 슈가의 랩처럼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다. 그런 브랜드가 되길 희구한다.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그래서 조급했고 늘 초조했어
남들과 비교는 일상이 돼버렸고
무기였던 내 욕심은 되려 날 옥죄고 또 목줄이 됐어
그런데 말야 돌이켜보니 사실은 말야 나
<최고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 것만 같아>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었었던 나>
그대의 슬픔, 아픔 거둬가고 싶어 나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
문을 하나 만들자 너의 맘 속에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곳이 기다릴 거야
믿어도 괜찮아 널 위로해 줄 Magic Shop



[작가의 말]

하지만 이렇게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은 마음도 결국

두 갈래로 보이는 세상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한 갈래로 통합되고 싶어서라 생각해 봅니다.

위로와 감동을 전하며 성장하고, 속도를 내더라도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다시 세상이 하나로 보이지 않을까요?


제 움직임이 영향이 되는 곳에선, 그렇게 살아보려 노력하겠습니다!




▶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은요.

작사가, 인터뷰어, 카피라이터, 시인, 작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포토그래퍼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또...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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