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집 간판을 보고 떠오른 단상
결혼해서 정착한 홍은동에서 난 마치 이방인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다섯 살 무렵부터 문정동과 가락동 등 송파일대에서 30년가량을 지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 내 유년시절의 송파는 드문드문 아파트가 서있던 서울스럽지 않던 동네였다. 도로 간격이 넓고 녹지가 많아서 뛰어 놀기 좋았다. 아파트 담벼락에 아름답게 열렸던 강낭콩을 젊은 나의 엄마와 함께 따먹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막 오픈했던 맥도날드, HOT와 핑클 노래가 흘러나왔던 음반가게, 블록버스터 영화포스터가 잔뜩 붙어있던 비디오가게, 펌프와 철권 소리로 귀가 아팠던 오락실, 절대 무사히 지나칠 수 없었던 길거리 닭꼬치 노점,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등학생한테 담배를 팔던 신문가판대, 한권에 300원짜리 만화대여점. 새벽 3시까지 운영했던 투다리. 대부분이 평지였던 가락동의 거리 곳곳에는 나의 유년과 청소년기, 대학시절과 백수시절, 돈을 본격적으로 벌기 시작했던 어른의 시간까지 모두 담겨있었다.
그래서 5년전 홍은동에 이사 왔을 땐 이방인이 된 것처럼 어색했던 것이다. 거리의 뉘앙스가 달랐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익숙지 않았다. 무언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 살아보니 홍은동은 지내기에 생각보다 쾌적한 동네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뒤는 북한산 자락길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고, 동네를 관통하는 홍제천은 쭉 걸으면 한강까지 갈 수 있다. 강남까지는 매우 멀지만 광화문이나 홍대 ·서울역까지는 자동차로 20분내에 도착할 수 있어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았다.
맛집도 많았다. 홍은동의 자랑 ‘쌍대포 생소금구이’에서는 제주도의 칠돈가보다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 또 런치 시간에 맞춰 ‘테리맘스키친’에 가면 9,000원으로 남한 최고의 매운 까르보나라를 먹을 수 있다. ‘모퉁이’라는 가게의 사장님은 2,500원짜리 닭꼬치를 최소 15~20분가량 구워주시는데, 어떤 음식도 정성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어머니와 아들(홍탁), 92숯불구이, 찜우동.. 그 유명한 돈까스집 ‘연돈’도 사실은 홍은동 포방터시장 출신이니, 맛집의 고장 홍은동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사한지 3년 뒤에는 사무실도 홍은동으로 옮겼는데, 출퇴근 거리가 획기적으로 줄어 다니기 좋았다. 여전히 가락동의 그것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서서히 홍은동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테리맘스키친에서 매운 까르보나라를 만족스럽게 먹고 나오던 중, 사진 속 족발집 간판을 보게 되었다. 내가 만든 간판이었다. 원래는 디트로이트 피자를 팔던 곳이었는데, 아이템은 좋지만 영 손님이 없다 싶더니 기어코 족발집으로 바뀐 것이었다.
족발집 사장님한테는 영업시간이 끝나갈 5시30분쯤에 연락이 왔는데, ‘낙원/족발/감자탕’이라는 단어를 시트컷팅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고 사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라 귀찮은 마음이 컸지만 거리가 가까워서 부랴부랴 시트를 만들어 퇴근길에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던 시트가, 낙원족발 사장님의 좋은 손재주를 거쳐 멋진 스텐실 간판으로 완성됐던 것이다.
간판은 나에겐 생존의 도구이지만, 도시미관 관점에서 보면 거리의 표정을 완성하는 오브제이다. 강남 같은 늘씬한 거리에는 비싼 LED간판이 많고, 어디든지 오래된 상가에는 플랙스간판과 고무스카시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을지로처럼 좀 오래된 동네에는 네온사인이 조명이 꺼진 채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홍은동에는 내 스타일대로 만든 간판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홍제사거리의 치과, 동신병원 앞의 영어학원, 구청 부근의 정치정당 합동사무소, 간호대 앞 닭꼬치집과 떡볶이집 등등 벌써 열개가 넘는 간판을 설치했다. 나는 간판을 디자인할 때 거리의 느낌도 함께 반영하는 편이라, 그 간판들 모두 홍은동의 표정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홍세화씨가 파리를 누비면서 택시 운전을 했던 것처럼, 나도 어느새 사다리를 들고 홍은동의 거리를 누비는 간판노동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화씨가 파리의 망명자로 시작해서 그곳을 점점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듯이, 나도 점점 홍은동에 간판을 늘려가고 있다.
구타와 욕설이 난무하던 18년 전 내 군대 시절. 아주 어렵게 백일휴가를 받았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려서 고대하던 롯데리아 새우버거를 먹고, 3217번 버스를 타고 가락동으로 향했다. 그렇게 당시 살고 있던 삼환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특별히 감상적인 마음이 들었다. 익숙한 옷차림의 사람들과 건물들, 아파트 화단에 잘 정리된 회양목,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어지러운 구축 아파트의 풍경이 나에겐 마치 고향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회양목을 훑으며 집으로 들어갔을 때, 감격하며 반겨주던 나의 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락동의 품 속에서 성장한 어른이 되어 살기 좋은 홍은동에 정착했다. 홍은동에는 내가 만든 간판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고, 그 만큼 이 동네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헤어 프로포즈’ 아줌마와 ‘유원부동산’ 사장님과 친해진 것처럼 나를 알아가는 사람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코 가락동과 똑같은 느낌은 받지 못하겠지만, 이곳에선 또 다른 뭉글뭉글한 추억들이 많아져, 내 머리 속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기억의 전당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는 홍은동이 곧 정체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제 홍은동의 망명자가 아니라, 홍은동의 간판가게 사장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