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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Feb 28.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운현궁

일곱. 역사의 회한...운현궁

집터에 있던 서운관(기상관측대)의 명칭인 雲觀운관과

운관 앞의 고개인 雲峴운현에서 한자 씩 빌려 온것.


1681년 여흥 민씨 인현왕후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繼妃계비(두번째 왕비)가 된다.

1689년 己巳換局기사환국.

환국은 권력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가 아들을 못 낳자 장희빈의 아들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인현왕후는 서인이 되고

숙종이 여흥 민씨 처갓집 식구들 살라고 지어준 感古堂감고당(옛일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으로 쫓겨난다.

외척들의 전쟁.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다.

1694년 甲戌換局갑술환국.

폐비 민씨 복권되고 장희빈 사약을 받는다.


시간이 흘러...


1820년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 이하응 출생한다.

1843년 후궁 계열이라 흥선군이 된다

안동 김 씨의 감시가 심하다.

破落戶파락호(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라 낙점된다.

1863년 철종이 아들 없이 승아자 고종이 얼떨결에 26대 왕에 오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들어간다.

왕의 아버지가 왕이 아닐 경우 대원군이라 부르는 것으로 조선시대 3명의 대원군 중 유일한 생존하는 대원군이라 좀 시끄럽다.

안동 김씨와 풍산 조씨에 질린 대원군은 힘없는 집안 찾기에 나선다.

1687년 지금의 여주나들목 근처에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는 묘막을 지은 후 여흥 민씨 집안은 대대로 왕궁과는 거리를 둔다.

1851년 여주군수 김치록은 외동딸을 순산하고 이 외동딸은 8살 때 고아가 되어 안국동의 할머니댁 인현왕후 생가로 올라온다.

운명.

1866년 금혼령.

초간택에 30명의 처녀들이 등장, 이간택, 삼간택을 거쳐 민치록의 외동딸이 왕비에 선정된다.

집안이 약하고 부모도 없어 휘둘릴 가능성 없다고 대원군의 사전각본에 의한 결과다.

명성황후는 할머니집 감고당에서 별궁으로 지정된 시아버지 댁, 운현궁 안채 老樂堂노락당(늙어서 즐겁게 지내는 집)으로 이사해 왕실법도교육을 받는다.

1866년 3월 21일.

고종 15세, 명성황후 이팔청춘 16세 운현궁에서 성대한 가례가 펼쳐진다.

(중전마마의 자식인 왕이나 공주가 결혼하는것은 가례, 후궁의 자식인 옹주가 결혼하는 건 길례)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

인현왕후에 이어 여흥 민씨는 185년 만에 왕비 배출한것.

이제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고종이 즉위한 지 한 달쯤 지나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 증축 공사는 시작되고.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 지원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십억 원대)

운현궁 준공식에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참석한다.

기념 임시과거시험 실시하여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고.

이제 대문도 4개에 이르는 대저택이 된다.

정문 경근문敬覲門 , 후문 공근문恭覲門.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하던 전용문이고 공근문은 대원군 전용문이었다.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가 죄다 운현궁이었다.

안채인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린 관계로 너무 신성한 곳이라 이제 안채로 쓸 수 없게 된다.

1869년 새로운 안채인 二老堂이로당(두 노인이 편안하게 사는 집) ㅁ자형으로 신축한다.

내밀한 곳이라 여긴 남자 출입금지.

1882년 임오군란.

구식군인들의 쿠데타.

명성황후는 고향의 민응식 집으로 도망갑간다.

청나라 군대 끌어들여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귀양 보내고 다시 정권을 잡게된다.

1885년 흥선대원군 4년 만에 귀국하고

민씨 일파에 의해 老安堂노안당(노인을 편안하게 해 주는 집)에 가택 연금된다.

1887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협력해 고종을 폐위하고 장남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다시 가택연금.

1894년 법무협판 김학우 피살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2개월 만에 사면되어 대원군과 마포 공덕리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지낸다.

我笑堂아소당(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스스로 조소하는 집,대원군 본인이 작명)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396-4 아소당터는 지금 동도고등학교

1966년 아소당은 서대문의 봉원사로 이전하고 염불당으로 현판을 바꿔 달았다.

1895년 을미사변. 치욕.

1898년 흥선대원군 아소당에서 눈을 감습니다. 향년 79세.

운현궁은 사적 제257호. 주소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114-10.

솟을대문 좌우로는 행랑채, 하인들 숙소.

여자들은 측면의 평문으로 다니고 하인들은 쪽문으로 다니고.

경술국치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한다.

이로당의 안주인들은 그냥 묵묵히 운현궁을 지켰다.

소유권이 넘어가거나 말거나.

해방 후 미 군정청은 운현궁에 공문을 보낸다.


흥선대원군 후손 재산 맞음.


대한민국 정부는 법원에 고소장을 낸다.

결국 대원군의 5대손 李淸이청(1936- )에게 운현궁 소유권 넘어간다.

1946년 후손은 궁핍해진 생활고로 운현궁 양관을 덕성여대에 매각.

이미 운현궁은 수만 평에서 2,000평으로 쪼그라들었고.

관리비도 없고. 변호사비도 없고. 다 팔아 먹었다.

이청은 시립대 교수가 되지만 교수 월급으로 운현궁 관리할 수도 없고.


1991년 매물로 나왔다.

서울 정도 600주년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가 80억에 매입한다.

안국동에 있던 감고당은 1966년 덕성여고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쌍문동 덕성여대로 쫓겨 갔다가 완전해체 위기에 처한걸 최근 여주군청이 명성황후 유적성역화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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