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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Sep 09. 2024

일반인문 기독교의 분열 2/2

;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국 개신교 교파의 분열

1957년 통계에서 우리나라 개신교의 교단은 13개 (한국기독교 연감_대한기독교서회)로 기록하고 있고 57년이 지난 2013년 「한국 종교 현황」 보고서에서 개신교 교단 232개로 늘어난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4년 Horace Newton Allen 호러스 알렌,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가 파견된 이래 140년이 지난 지금 200개가 넘는 교파와 6만개가 넘는 교회가 세워진것이죠.

더욱이 전 글에서 세계의 종파의 분열 이유는 (시대별 특성에 따른) 성경의 해석이 원인이었던것이었던것에 비해 한국의 교단분리 이유는 민망할만큼 개인적 이해, 인간관계, 집단의 이익에 의한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과연, 지난 140년간, 짧게는 1957년 이후 한국교회에는 무슨일이 있었을까요?

초기 선교 당시 개신교 파송 국가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이 중 미국은 압도적 수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한국교회의 색은 거의 미국의 교회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유럽스타일의 경우 한 국가 안에 하나의 종교나, 교회만이 국가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국가교회 시스템이었던것에 비해 미국은 수 많은 교회들이 헌법에의해 종교의 자유에의해 보장되어 지역마다 다양한 교파들이 경쟁하며 공존했던 교파주의로 이러한 교파주의형 교회가 한국교회에 이식되었습니다.

한국의 교단 분열의 바탕이된 첫째원인은 선교사 파송 국가의 교회에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는 유불선의 거대한 종교들이 있었고 여기에 무속신앙이라는 뿌리 깊은 전통종교가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수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야 했기에 교파차이에도 불구하고 협력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서로 연대해서 선교를 하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해  「복음주의 선교 공의회」 라는 연합을 결성하고 이 단체를 통해 각기 다른 교단의 교회를 세우기보다 한국에서 만큼은 하나의 연합된 교회를 세우려는 운동을 전개해  「대한예수교」 라는 명칭으로 통합된 교회를 세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사들의 의도를 본국의 교회나 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해 결국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해 한국교회 분열의 토대가 됨.

둘째 이유는 파송 교단에 의한 지역 분할이 그 시작점에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들어왔을때 서로간 불필요한 경쟁이나 분쟁을 막고 제한된 인원으로 효과적 선교를 위해 1909년 「선교지 분할 협정」 을 맺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도를 놓고 서로 영역을 분할한것입니다.


함경도 지역 ; 캐나다 북장로회

서북(평안도, 황해도)+대구, 경북지역 ; 미국 북장로회

전라도 지역 ; 남장로회

부산, 경남 지역 ; 호주 장로회

서울, 평양, 원산은 모든 교파가 선교

원래 목적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와 경쟁을 피하기 위함이지만 그 지역의 교회는 독점적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교파와 지역색으로 연결됨으로 타 지역 교회들과 배타적 경쟁관계가 만들어져 후에 한국 교회가 분열하고 갈등할때 중요한 내부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나라 교회들은 세월이 지나며 초기 협력과 공존 정신과 어긋나 1930년대를 기점으로 갈등하며 교단을 분리하게 됩니다.


1910~1930년 초기 교단의 분리 - 외국선교사와의 갈등


● 1910년 전북, 최중진 목사


최초의 교파 혹은 교단 분열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1910년부터 그 시초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장로교에서 뛰쳐나간 사건들이 1910년 전북 최중진 목사와 그를 따르던 10개 교회가 「대한예수교 자유교회」를 세우는데 그 지역의 외국선교사들과 최목사와와의 갈등이 생겨서 최목사가 분리하게되었는데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 사이 관계가 거의 주종관계로 상명하복의 형태로 이루어져 외국선교사들이 모든것을 마음대로 하려하면서 불거진 문제가 고조되면서 분리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우월주의로 당시 외국선교사들은 신학교육을 시키면서 소위 「Nevius Mission Plan 네비우스 선교정책」 을 수용하며 당시 외국선교사들은 한국목회자들에 대한 신학교육수준를 ‘평신도보다는 조금 높게, 선교사들보다는 조금 낮게’로 규정합니다.

외국선교사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목회자를 양성하지만 그들이 성장 할수 있는 선을 제한한것이죠.

초창기에 한국사람들은 이를 수용하고 따르지만, 나중엔 지적, 목회적역량면에서 성장한 한국목사들이 볼때 동등한 동지로 보지 않고 단지 목사가 양성되기 전 선교사를 도와 교역 일선에서 사역하던 조사수준의 아랫사람으로 여기는것에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생겨 결국 교회를 분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교단 분리는 결국 외국선교사들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는 하지만 분열된 교회는 이단으로 공격 당하거나 어려운 목회를 이어가다 대부분 소멸합니다.


● 1918년 황해도 김장호 목사


1916년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김장호 목사는 진보적 성향의 목회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설교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는 소문이 나자 그가 속한 황해도노회에서 의회 민주주의적 교회 운영과 자유주의 신학에 의한 합리주의적 성경 해석에 근 거한 비정통적 성경 해석을 권고하고 총대권을 박탈하였고 여기에 김장호 목사가 불복하자 1918년 제15차 황해노회는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면직 조처하였고 김장호 목사는 이에 그를 따르는 성도들과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워 「조선기독교회」 라는 새로운 독립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 1923년, 이만집목사의 자치교회


이만집 목사는 3.1운동 당시 대구지역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출옥 후 선교사들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사건을 일으키자 경북노회에서는 1923년 이만집과 그를 지지하는 남산교회 목사 박영조를 정직시키고 남성정교회 장로 4명과 집사 1명을 면직시킵니다. 

그러자 이만집 등은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하며  「자치교회」를 창립했습니다.

이후 2005년 예장통합 경북노회가 이만집 목사 복권위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역사연구 위원회를 조직하고 논의한 끝에 이만집 목사의 복권을 결정하였습니다.


● 1930년대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와 이호빈 목사, 장로교의 백남주 목사와 한준명 목사는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으로 뜨겁게 활동하던 목회는 유명화의 신비체험과 관련하여 장로교와 감리교 양쪽에서 비난을 받으며 고통을 받고 배척당하자, 토착적인 선교와 신학을 기치로 삼고 1933년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예수교회」 를 설립하는데, 이용도 목사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이호빈 목사가 바통을 이어가며 해방후 이환신, 이종현, 이호운과 함께 교파 없는 신학교, 평신도를 가르치는 신학교, 그리고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는 자주자립적인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946년 중앙신학원(현 강남대학교)을 개원했습니다.

1948년 8월 12일 우리나라 신학교로는 처음으로 대학령에 의한 4년제 정규대학으로 문교부에서 설립인가를 받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36년, 성결교에서도 외국선교사와 한국인 목사간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변남성 목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교단을 탈퇴하고  「하나님의 교회」 라는 교단을 설립합니다.

1956년 한양신학교를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 설립, 1978년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가입하고 200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한신)으로 명칭을 변경합니.


결국, 1910~30년대 교회 분열의 원인은 외국선교사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원인이 됩니다.


해방 후 본격적인 교단 분열


● 신사참배로 시작된 분열


신사참배에 거부했던 이들이 스스로 다른 이들과 구별하여 세운 교회가 「재건교회」인데 이 교회가 분열의 시작이 됩니다..

해방 후 장로교 대표들이 모여 「남부총회」 를 개최하는데 총회 결의 안 중 「조선 신학교(현, 한신대)」 가 남한의 유일한 신학교로 이를 장로교회의 유일한 교단신학교로 인준합니다.

이때 결정사항을 지켜보던 소위, 출옥성도(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고문당하다 살아남은 성도들)가 남부총회를 주도하던 사람들로, 조선신학교를 인준한 사람들이 회개도 하지 않은 신사참배 동의, 동참했던 사람임을 알고 이들이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고 교계를 끌고 나가는것을 보면서 문제를 제가하게 됩니다.

최소한 참회와 회개 후 직무에 복귀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 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을 본 평북, 선천의 김린희 전도사와 마산 호주장로회에서 활동하던 최덕지가 중심이 되어 재건교회를 조직(1946년)합니다.

이들이 주장은 신사참배했던 기존 교회와 단절하고 기존 예배당에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설치한 일장기와 かみだな 가미다나(신을 모셔 놓은 제단)에의해 오염되었기에 성전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완전한 모습을 재건한다는것입니다.

경남노회 안에서 이렇게 신사참배에 반대 했던 사람들이 모여 「고려신학교」 라는 신학교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 이라는 교단이 분리합니다.


● 성서비평학이 트리거가된 신학적 차이에의한 분열


분열의 진원지는 앞에서와 같은 조선신학교.

북한의 평양신학교는 공산당이 북쪽을 장악하면서 폐교가되며 결과적으로 남한쪽의 조선신학교만 남습니다.

당시 조선 신학교는 일제시대때 존재했던 여러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 모이면서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신학교에서 가장 영향력 잇엇던 진보주의 성향의 구약성서 성서학자 김재준목사는 성서비평학을 가르쳤는데 이전 평양신학교 출신의 보수성향의 학생들에게는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국 이들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지 못해 「조선신학교 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동지」라는 조직을 만들고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을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이 진정서로인해 장로교 총회안에서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며 학교 차원을 넘어 교단 전체의 문제로 발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무위로 끝나고 1953년 조선 신학교 내 김재준 목사 지지자들과 600여 교회가 모여 「한국 기독교 장로회 기장」이라 부르는 교단으로 분열합니다.


●  WCC와 신학교 부지 사기로인한 분열


세번째 분열에는 2가지 문제가 얽혀 있는데 하나는 교회부지 사기사건이고 다른ㄴ 하나는 WCC 문제였습니다.

이 분열의 중심에는 당시 한국 장로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박형룡 교수가 있습니다.

박교수는 당시 보수 장로교 신학의 가장 권위있는 신학자로 우리나라 평양신학교에서도 교수를 역임했고 신사참배문제가 발생 했을때 잠시 피신해 있다가 해방후 부산에 세워진 고려신학교에서도 교수를 역임했으며 후에 조선신학교에 대항해 새롭게 설립된 총회신학교에서도 교수로 청빙되며 해방 후 우리나라 신학교를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로 수 많은 제자를 양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한경직 목사나 김재준 목사와는 신학적으로 결이 달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적 또한 많았던 인물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학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모자란 교육공간을 위해 새로운 학교건물을 준비하기위해 관련된 사람을 소개 받아 비용을 지불했는데 금액은 미국에서 보낸 후원금으로 당시 건물 몇채를 매입할만한 금액인 3천만환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돈을 사용하는데 이사회 승인없이 직권으로 지출했지만 건물을 짓지 못한채 후원금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에대한 책임론이 대두되며 박교수 지지자들과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반대사람들이 대립합니다.

이 사건 이전인 1958년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문제로 장로교는 내분이 일고 있었습니다.

WCC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이 된 기독교 교파들이 서로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 협동을 통해 기독교 일치와 갱신을 이루고자 하는 교회 일치 운동(Eccumenical Movement)의 상징이자 구심점을 이루는 조직으로 우리나라 장로교는 WCC의 창립때부터 회원으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하며 이 WCC에 가입을 하게되고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회원이 되면서 WCC의 사회주의 국가의 역량이 커지는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보수성향의 장로교 목사들이 “WCC가 점점 공산화 된다”고 주장하며 WCC를 용공(容共: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이라는 문제 제기를 합니다.

그런 중에 미국복음주의 보수연합인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영향을 받아 일부 보수목사들이 모여 조직을 구성하여 WCC를 비판합니다.

신학교 부지구입과 관련된 재정문제와 WCC문제가 얽히면서 신학교 부지구입과 관련 박형룡 목사의 사퇴와 WCC옹호자들과 WCC반대와 박형룡 목사지지자들이 분열하며 반목합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로 WCC를 반대하고 박형룡교수 지지했던 측이 승동교회에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며 이 전의 고신측을 지지하며 합동총회를 개최하며 대한예수교 합동이라는 교단이 만들어지고 반대측으로 WCC를 옹호하고 박형룡교수를 반대한 측이 서울 연동교회에서 독자적 총회를 열며 대한예수교 통합이라는 교단이 만들어집니다.


WCC문제는 성결교 교단도 예성(대한예수교 성결교)와 기성(기독교대한 성결교) 2개로 갈라 놓습니다.


세계 기독교 분리원인과 다른 한국교회 분리


이렇듯 한국교회의 교단분리는 (시대별 특성에 따른) 성경의 해석에의한 분열이라는 세계교회 문제와 비교해 한심스러울정도로 신학적 사회적 쟁점이 아닌 개인적 이해, 인간관계, 집단이익이라는 종교 이외의 문제로 분열합니다.


그럼에도 분열만이 있던것이 아니고 대전과 포항 이 두 지역으로 분열되었던 침례교는 한국침례회연맹(현, 기독교 한국 침례회)로 통합했고 감독 선출문제로 끊임없이 반목과 질시가 지속되며 한때 4개 교단으로 분리 되었던 감리교도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로  재통합합니다.

6만개가 넘는 교회와 200개가 넘는 교회는 반세기동안의 기록적 복음을 민망하게하는 분열이 아닐 수 없습니다.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예수의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마가복음 구절에만 집중한 기독교는 로마를 통해 성장했고 종교로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을 잃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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