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II 조선사

아홉. 실학자(?) 정약용 4/7

by Architect Y

다산이야기 04 노비제도 다산과 다산 외 성리학자들

; 세번째이야기 다산의 노비에 대한 생각


조선의 계급 중 조선의 군역(병역 의무)은 良人양인이 담담하였다.

다시 말하면 노비는 군역의 의무가 없으니 노비 수가 많아지면 군역을 담당할 수가 적어진다.

그러다보니, 세종대왕은 모두 돌려보내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민들은 군역을 감당치 못하여 도망을 가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노비를 줄이고 양민을 늘리어야 한다는 상소문이 조선 500년 내내 이어졌다.

노비를 줄이는 방법은 당장에 노비를 모두 해방시킬 수 없으므로 노비의 자식이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여 결국에는 노비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

큰 집과 많은 농지를 소유한 벌족은 노비의 노동력으로 재산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니 노비를 줄이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는것이다.


다산은 어느쪽 이었을까...

미안하게도 다산은 노비 해방을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노비 세습이 완화된 제도를 고치어서 노비를 늘리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산의 한시 哀絶陽애절양을 예로 들으며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전하기도 하지만 이런글은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산을 이야기 하면 그 첫째로 올리는 책이 벼슬아치들의 행동을 이야기한 「목민심서」일 것이다.

그럼 그 내용을 들여다 볼자면...


예기에 이르기를 군신과 상하는 예가 아니면 그 질서가 정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성인이 開物成務개물성무(만물의 뜻을 밝혀서 인간의 질서를 마련함)의 문채를 만들어 귀천을 표시하였으니, 소위 황제·요·순이 의상을 드리우자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하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公服공복의 문채에 등급이 있고 깃발의 술에도 등급이 있으며 수레에도 등급이 있으며 지붕의 골에도 등급이 있으며 제사에도 등급이 있어서 그 질서가 정연하여 상하의 등급이 명백하였으니, 이것이 성인이 세상을 통솔하고 백성을 안정시킨 대권이다.

우리나라 습속에도 변동이 자못 엄하여 상하가 오로지 각각 그 분수를 지켰다.

근세 이후로 爵祿작록이 한쪽으로 치우쳐 귀족이 쇠잔하자, 豪吏豪甿호리호맹(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아전과 백성)이 틈을 타서 기세를 부려서 이들의 집과 말치장의 호사스러움과 의복과 음식의 사치스러움이 모두 법도를 넘어, 아래가 위를 능멸하고 위는 시들게 되어 다시 등급이 없어졌다.

장차 어찌 사회를 유지 결합하여 그 원기를 북돋아 그 혈맥을 통하게 하겠는가.

귀천을 밝히고 지위의 서열을 구별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이다.

......중략......

옹정 신해년 1731년 이후로 무릇 私奴사노의 양인신분 妻처 소생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게 되었다.

그 이후로 상층은 약해지고 하층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의 뜻이 흩어져서 통솔하고 이끌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신해년 이후 귀족은 날로 시들어 가고 천민은 날로 횡포해져서 상하의 질서가 문란하여 敎令교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한번 변란이 일어나면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스러지는 형세를 능히 막지 못할 것이다.

군왕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고 수령은 나그네와 같아서 마을 이웃 간에 어리석은 무리를 통솔하고 이끌 방도가 없으면 어찌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무엇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러움으로 망하는 것을 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 1818년 牧民心書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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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쪽이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의 신분이 되는 種母法종모법을 반대하며 대를 이어 노비로 이어지는 세습을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산에게는 군역의 의무라든가 하는 국가적 문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은것으로 이 책 내용을 읽을 수 있다.

哀絶陽애절양은 근본적 원인은 도외시한 채 동정심이 많은 척하는 글에 불과하여, 자신의 집에 있는 사노비를 해방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반면 앞글에서 이야기 한 내용에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노비제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고 올렸다.


유형원의 磻溪隨錄반계수록-1670년에는 종모법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실제 2010년 서울대 인문대 정시 논술 문제로 올라와 있다.

우리가 익히들어 알고 있는 정조-정약용의 고리를 보면

정조는 노비를 정약용처럼 생각했느냐... 아니다.

정조는 노비라는 명칭까지 없애고자 하였다.


실로 그 근원을 궁구해 보면 그 노비라는 이름을 싫어하고 사람들도 그들과 어울리기를 부끄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때를 놓침으로써 인륜의 도리가 막히는 데 연유하는 것이다.

누적된 폐단을 흔쾌히 없애 주는 것은 오직 그 노비라는 이름을 없애 주는 데 있다.

그러나 노비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箕聖기성(기자) 이래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법으로 명분의 큰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이름을 없앤다면 私賤사천들도 다 본떠 행하려 하여 마침내는 명분이 싹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 이름을 없애는 것은 그래서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奴노에게 신공을 지우는 폐단도 의논해서는 안 될 것이란 말인가.

양역에서 황구와 백골에 징수하는 것은 그래도 閑丁한정에게 책임 지워 받아 낼 수 있지만 저 노비는 이 숫자만큼만 있어서 액수와 노비안이 서로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논의를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 놓아둔다면 절대 이럴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두 가지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다.

- 홍재전서 제33권, 敎교 奴婢貢노비공의 폐단을 혁파하는 데 대하여 묻는 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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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노력하였는데도 왜 노비제를 폐지하지 못한것은 다산 정약용 같은 기득권자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를 아직도 식민사관과 유신사관의 시점에서 바라보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면 너무 억울할것이다.

다음회에는 다산의 강점과 역사속에서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

그리고 궁금증이 유발된 다산과 정조의 관계, 다산이 역사에서 대세로 올라온 계기, 다산의 사생활등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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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絶陽애절양(남자의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며)

- 丁若鏞정약용


갈밭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 소리.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다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 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조자손 삼대 이름 모두 군적에 실렸네.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아이 낳은 죄로 고생 길에 드는 걸 한스러워 그랬다네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나라 자식이 환관이 되려고 거세함도 슬픈 일이거늘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대 이어갈 백성들이야 말을 더해 무엇하리오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


蘆田少婦哭聲長 哭向縣門號穹蒼 노전소부곡성장 곡향현문호궁창

夫征不復尙可有 自古未聞男絶陽 부정불복상가유 자고미문남절양

舅喪已縞兒未澡 三代名簽在軍保 구상이호아미조 삼대명첨재군보

薄言往愬虎守閽 里正咆哮牛去皁 박언왕소호수혼 이정포효우거조

磨刀入房血滿席 自恨生兒遭窘厄 마도입방혈만석 자한생아조군액  

蠶室淫刑豈有辜 閩囝去勢良亦慽 잠실음형기유고 민건거세양역척

生生之理天所予 乾道成男坤道女 생생지리천소여 건도성남곤도여

騸馬豶豕猶云悲 況乃生民思繼序 선마분시유운비 황내생민사계서

豪家終世奏管弦 粒米寸帛無所損 호가종세주관현 립미촌백무소손

均吾赤子何厚薄 客窓重誦鳲鳩篇 균오적자하후박 객창중송시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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