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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당 영화당
by 숲속의참치 Oct 09. 2018

어린시절 그 곰돌이 만났지만,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곰돌이 푸 다시 ‘나를’ 만나 행복해

곰돌이 푸 다시 ‘나를’ 만나 행복해


  옛날 옛적에….


곰돌이 푸를 다시 만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영화의 제목은 마치 우리에게 행복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듯하다. 첫사랑 또한 그러하듯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들은 그 시간 속에 흐트러져 본래 추억과는 달라져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운 것을 다시 만났을 때 막연히 행복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인데, 엄밀히 따져 묻자면 곰돌이 푸는 그런 추억조차 아예 사라져버렸기에 우리가 마냥 행복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가까운 과거는 슬픔에 젖지만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동화들의 특징 그 첫 번째. 동화가 펼쳐지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결말에선 그 모든 것들이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말로 끝나 버린다. 마찬가지로 곰돌이 푸는 동화 속 인물이기에 우리가 그를 잊어도 그다지 슬프지 않다는 말을 꺼낼 수가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동화 속 인물들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에, 우리가 그를 잊어도 그는 여전히 해피엔딩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는 그 오래된 동화를 다시금 이곳에 꺼내 놓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만나 행복하다고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말하자면 이것은 마치 막연하게 웃음 짓는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훗날의 이야기는 모르겠으나 현재만큼은 정말로 행복하다는 동심에 가까워 보인다.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났을 때도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 영화에는 동심과도 같은 낙관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꿈이야 생시야?!


어린 시절 꿈과 환상의 숲에서 푸와 친구들을 조우한 크리스토퍼 로빈은 나이가 들어 집을 떠나게 되고, 그렇게 세월에 찌든 로빈 앞으로 푸가 갑작스레 떨어진다. 앞뒤 설명 없이 그저 갑작스럽게 나무 구덩이를 지났더니 시골에서 런던으로 점프해버린 푸의 모습은 정말로 ‘거짓말’ 같다. 어쩌면 영화가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동화라는 명목으로 개연성을 합리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동화적인 현상은 애초에 곰돌이 푸가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점에서 한 수 접어두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명백하게 관객의 추억에 의존해 과거를 되짚는 방식, 즉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마법에 걸린 숲에서 곰돌이 푸는 안개가 자욱한 20세기의 런던으로 ‘점프’한다. 환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안개는, 스모그는, 인간이 만들어 낸 환경오염이 아니라 그 환경오염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동심 어린 향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의 안개는 마치 해리포터가 다니는 호그와트에 걸린 주술, 머글들로부터 마법 학교를 은폐하는 도구로써 사용되는 게 아닐까. 이 만들어 낸 산업혁명으로 도시 전체에 걸린 이 주술은 혁명 이전의 깨끗한 삶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이 늙은 중년의 신사 크리스토퍼 로빈 또한 도시로 오며 순수함을 잃어버린 이들 중 하나로, 일에 치여 어린 시절의 동심 그 말끔한 시골을 싹 다 잊어버린 채이다. 너무 바빠서 딸과 아내가 시골집에 내려가는 것도 따라가지를 못한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렇게 보면 마법 같은 주술을 통해 로빈 앞에 나타난 이 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온 것이다. 추억 속에 깨끗함으로 남겨져 있던 시골 풍경이 갑작스레 나타나 삶에 찌든 도시를 구원한다는 이 설정은 그런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영화에서는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타락한 현재로부터 순수했던 청년 시절로의 회귀를 ‘꿈’꾸게 된다. 광주의 군인이었던 그는 끝내 결말 부분에서 죽음 이후에야 최후의 순수를 맛보게 된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환상 속에서야 비로소 순수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열차가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물론 이창동의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와는 다르게 <곰돌이 푸>는 꽤 가벼운 톤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실 이 영화 또한 단순히 추억으로의 회귀만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추억이 몹시 추악하고 슬프거나 잔혹하다는 점에서는 이창동의 그것과 비견될 만하다. 영화 초반에 짤막하게 스쳐 지나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로빈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만약 이 영화가 말하는 동심, 곰돌이 푸로 대변되는 그 순수함이 광기에 서린 전쟁 이전의 삶이라면, 이 영화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잔혹한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고픈 이들의 환상일 것이니 말이다. 


잔혹한 전쟁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전쟁의 슬픔과 비극을 찾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곰돌이 푸가 손에 든 빨간 풍선 때문이다. 알베르 라모리스 감독이 1956년에 만든 30분짜리 단편영화 <빨간 풍선>이 바로 그런 이야기이다. 그 단편영화의 내용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빨간 풍선을 손에 쥔 어린아이가, 그 빨간 풍선과 함께하고 또 그 풍선도 자아가 있어서 어린아이를 따라온다는 설정이다. 어린아이는 골목길에서 빨간 풍선을 탐내는 아이들 무리에 쫓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끝내 심술 맞은 아이의 계략으로 빨간 풍선이 터져버리고 만다. 이때 아이는 살아있는 이가 죽은 것처럼 (실제로 자아가 있었으니) 슬퍼하는데, 아주 놀랍게도 죽은 풍선의 주검 위로 전 도시의 풍선들이 ‘자아를 가지고’ 다가온다. 그리고 소년은 그 풍선들을 모아 디즈니 영화 <UP>의 한 장면처럼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말하자면 이것은 환상이다. 


단지 다섯 번의 대사만이 언급되는 이 영화는 사실상 무성 영화에 가까운 만큼 푹 빠져서 보게 되는데, 이 영화를 볼 때만큼은 우리 또한 빨간 풍선이 정말로 살아있으리라고 믿게 되는 면이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빨간 풍선에 추억조차 없는 어느 누군가도 환상 속에 빠뜨리게 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대만의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2007년에 이 영화에 존경을 표하며 일종의 ‘후속작’을 만든다. 호우샤오시엔의 2007년 작 <빨간 풍선> 또한 자아를 가진 풍선을 주운 어린아이에게 벌어진 소소한 일상이지만, 56년 작과는 다르게 건물 밖에서만 뺑뺑 맴돌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즉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밖에서 뛰노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맞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아이를 방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게 공포가 된 것이다. 아마도, 예전 아이들이 거리에서 꿈을 꾸었다면 요즘 아이들은 방안에서 꿈을 꾼다는 뜻일 테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 두 <빨간 풍선> 작품 사이에 벌어진 시대적인 비극이 <곰돌이 푸>에도 동일한 구도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 몹시 슬프다. 로빈의 어린 시절이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동심을 품던 것이었다면, 어른 시절의 로빈은 집 안에 박혀 행동을 제약하는 중이다. 작중 곰돌이 푸의 말처럼 회사를 무척 두려운 괴물에 비유하는 로빈의 모습을 본다면 영화에서 회사와 같은 사회, 스모그로 가득 찬 영국의 현대적인 모습은 집이라는 개념을 바꾸어 놓는다. 어린아이에게 집이 자신을 속박하는, 부모의 꾸중으로 가득 찬 도피하고 싶은 공간이라면, 어른에게 집이란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명목뿐인 장소이다. 말하자면 이는 어쩌면 집이라는 공간의 개념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의 단편이 곧이 투영된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이 된 로빈에게는 회사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고, 집에 돌아가면 실망하는 아내와 딸이 있다는 점에서 발걸음이 무거우므로, 로빈을 위한 장소는 본원적으로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로빈을 위한 집은 없다. 전쟁을 마친 후 돌아온 그의 고향은 그가 겪은 일련의 고통으로 인해 더는 예전과 같지 않다. 전쟁이 끝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로빈과 그의 국가의 모습은 그가 지니고 다니던 나침반에서 확인된다. 길을 잃지 않는 도구라고 푸에게 나지막이 말해주는 로빈의 모습은 마치 이 도구만이 자신의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로빈이 전쟁하는 장면은 입대를 위해 기차를 타는 장면, 전쟁터에서 폭탄이 터지는 장면, 그리고 집으로 귀환하는 단 세 장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의 상처는 로빈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다. (또는 전쟁 같은 사무실) 사실 이 전쟁이라는 것은 현실이나, 그에 버금가는 슬픈 마음 두 가지 모두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전쟁의 상처와 ‘전쟁 같은’ 삶이라는 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은 채로 이 영화는 로빈과 푸의 만남을 중개한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집과 방향을 잃은 사람들


전쟁의 가장 큰 공포는 가정을 가진 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만약의 가정이다. 자신이 돌아가야 할 그 집에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데 만약 이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죽는다면 그 집은 기꺼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고, 그것은 곧 세상에서 가장 큰 공포이다. 로빈의 패배적인 태도는 단지 중간관리자로서 아랫사람들을 잘라아만 한다는 슬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전쟁 같은 삶에서 물러서게 된다면 자신의 가정이 파괴될 것이라는 공포심에서 비롯된다. 또는 아랫 사람들을 해고함으로써 그들의 가정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을 해고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정이 파괴된다는 이분법의 논리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전쟁 이전의 순수함이 자신에게로 우연히 다가온 것을 본 로빈은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그는 안개 숲에서 길을 잃은 푸에게 나침반을 선물하고, 푸가 나침반을 받아들일 즈음에는 안개 숲에 안개가 걷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말하자면 이 안개 숲은, 로빈의 마음속에 맺힌 근심이 사라짐과 동시에 말끔해진다. 


그렇다면 그 마음속에 사는 이들은 로빈의 동심을 대변하는 구성요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안개 마을에 한가운데 거친 바람을 맞아떨어진 푸의 친구들의 집에는 바람의 방향을 알리는 풍향계가 고장나 있고, 그건 곧 푸에게 주어진 나침반으로 보완된다. 말하자면 푸의 마을은 로빈이 없게 된다면 방향을 잃게 되고 로빈이 있으면 방향을 찾는다. 즉 푸의 마을인 그 숲에는 로빈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방향을 잃게 되는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때 만약 그곳이 로빈의 마음속, 근심이 풀리자 자욱한 안개가 사라지는 상황은 우리가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보았던 상황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주인공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들이었듯이, 푸와 친구들의 모습은 흡사 로빈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용감한 티거는 로빈의 용기를 대변하고, 피글렛이 도망가고 싶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면, 무기력한 이요르의 모습은 세상에 찌든 그의 피로를 대변하는 것일 테다. 똑똑한 체하는 아울은 비루한 그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한줄기의 자존심이다. 그런 성격적인 기입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면 이 영화는 로빈이라는 참전용사의 PTSD 극복기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창동이 그 잔혹한 상황을 통해 단지 역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얼룩진 삶 또한 그려냈듯이, 이 영화에서의 전쟁은 전쟁 같은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할 새로운 전쟁들에 대한 예방책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지 곰돌이 푸라는 추억 속의 만화를 지금 우리 스크린 위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볼 만하다. 로빈과 푸가 마음속의 안개를 거두어낸 만큼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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