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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보는 영화
by 숲속의참치 Sep 21. 2017

음악으로 보는 영화 - 히로시의 회상.

어른 제국의 역습, 우리들의 워게임

<하는 거 없이 응원만 잘하는 두 놈>
< 휜둥이는 왜 안 태워주나요.>



특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영화가 가진 고유의 정서도 중요하다. 모든 영화에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주제를 압축해 놓는 장면이 있는데, 특정 주제, 특정한 장면이 서로 겹쳐질 때 음악이 주는 울림은 배가 된다. 

그러한 장면은 대부분 영화의 절정에서 나오는 게 대부분이지만, 예외도 있다. 비교적 최근 개봉작인 <라라 랜드>의 오프닝 장면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장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오프닝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두 영화는 첫 장면에서 앞으로 영화가 어떤 분위기를 유지할지 설명해준다.

이렇듯, 굳이 특정한 위치나 장면을 염두에 두고 음악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느 순간에 음악을 흘려 보내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음악은 서사만으로 전달되지 않는 세세한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말하자면 관객들이 영화 속 세계로 편히 입장할 수 있도록 레드 카펫을 깔아준다. 

20세기와 21세기의 사이, 구시대와 신시대의 사이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애니메이션 영화 2편을 꼽았다. 극 영화는 인물의 연기와 현실 세계의 배경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는 오로지 의미의 전달만을 위해 음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른 제국의 역습>과 <우리들의 워게임>은 각각 2001년과 2000년도에 개봉했다. 두 작품은 새천년이 넘어가던 그 시기의 다른 영화들과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백 년 남짓한 수명을 가진 우리에게 천년의 세월이 주는 의미는 무척 컸고, 희망과 불안이 공존했다. 마치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지난 세기를 후회하거나 새로 태어날 미래를 기대했다. 두 작품은 그중에서 희망을 말하고 있다.  

새천년이 가지는 의미는 양가적이다. 구시대와 결별하며 신시대와 만나는 것은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른바 ‘환생’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시절의 사람들은 그만큼 ‘환생’을 꿈꾸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박하사탕, 2001>이 ‘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래’라는 한 줄의 대사로 반성하지 않는 한국 근현대사를 비판한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 2000>은 남북한이 화합할 미래를 상상한다. 

소개한 두 영화 중, ‘환생’이 직접 드러나는 작품은 <우리들의 워게임>이다. <우리들의 워게임>이 ‘환생’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무척 종교적인데, 위기에 처한 두 디지몬이 ‘합체’하며 ‘부활’하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디지몬이 합체할 때 십자가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이후 하나가 된 디지몬이 알에서 깨어나는 것도 상징적이다. 알에 갇힌 현 상황이 어두컴컴하다면, 알을 깨고 나오는 건 그 자체로 미래에 대한 염원과 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혹은, 알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하나의 신화를 형성하기도 한다. 박혁거세처럼 말이다. 

그동안 여러 영화(대표적으로 매트릭스)에서 ‘부활’과 ‘희생’의 테마를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를 인용했지만, 이 영화의 장면과 음악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건 ‘디지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일단 디지털 세상에서 태어난 존재인 ‘디지몬’과 주인공 아이들의 유대는 그 무엇보다 끈끈하다. 이건 디지털 세대가 얼마나 ‘디지털’이라는 것에 익숙해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 모험하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모험 서사’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들의 워게임>이라는 작품이 이름난 것은 디지몬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고 생겨난 디지몬이라는 가상의 존재는 선하며, 동시에 악한 존재도 있다. 어느 곳에나 선과 악은 공존하고, 디지몬 시리즈는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의 디지몬을 제시하며 디지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디지몬은 등장인물과 일대일 대응을 통해 유대를 쌓는데, 사실상 주인공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조작하지 않으며 함께 행동하는 동료지만, 유사시에는 주인공과 디지몬이 합체하거나 마음을 동화하여 싸우기도 한다. 게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가 원하는 자신의 이상향을 투영하여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다. 

그런 면에서, 디지몬이라는 작품은 모험을 통한 인물의 성장을 보여줌으로써 디지털 시대의 좋은 면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매일 게임이 나쁘다 좋다를 두고 싸우지만, 우리가 이런 토론을 하기도 훨씬 전에 디지몬은 디지털 시대를 긍정하고 있었다. 온라인상에 나를 투영해 성장하고, 멀리 있는 사람과 하나의 시공간에서 유대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들의 워게임>이 전 디지몬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이러한 디지몬 세계관을 정면으로 뒤집었고,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서사였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바이러스와 같은 디지몬이 등장해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다. 악성 디지몬으로 탓에 디지털을 바탕으로 설계된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핵미사일이 발사되어 위기에 빠진다. 

그런 부분을 보면, 당시에 유행하던 밀레니엄 버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설정임을 알 수 있다. 지금껏 디지털로 인해 인류의 삶이 윤택해질 것으로 생각해왔던 사고에 문제의식을 일으킨 것이 밀레니엄 버그였고, 그것이 <우리들의 워게임>에도 잘 투영되어 있다. 

일단, 작품에서 미사일이 낙하하기까지 10분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이 마치 ‘새해를 카운트 다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핵과 함께하는 새해가 밝아오기까지 10분, 그 시간을 움직이는 시계를 찾아 헤매지만 악성 디지몬이 분열해 찾기가 힘들다. (핵 문제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로 읽을 수도 있다.) 

절망적인 순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자신들을 응원해오던 세계인들의 염원이 방해된다. 디지털 시대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의사소통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특성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세계의 멸망을 앞당기게 된다. 수많은 악성 디지몬을 두 명이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거기에 세계인들이 보내는 이메일로 네트워크에 부하가 걸리고 만다. 

그리고 방해 덩어리였던 이메일들이 두 디지몬을 구원하는 순간이, 작품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두 곡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와 ‘찬송가’가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다. 그동안 디지몬을 통해 디지털 세계의 유토피아를 그려냈던 ‘디지몬 시리즈’가 인터넷 시대의 동시성을 악이 승리하는 요인으로 제시하고, 관객들은 그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디지몬 시리즈의 근간을 부정하는 장면에서 충격받게 된다. 두 주인공의 아바타와 같은 디지몬의 죽음에 ‘개인의 죽음’을 투영한다. 

작품은 관객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 바로 서사를 뒤집어 두 디지몬을 부활시킨다. 죽음의 원인을 부활의 원인으로 병치하며 인터넷 시대의 양면성을 한 번에 보여준다. 그 순간에 흐르는 찬송가가 앞에서 망쳐진 일상을 보여주며 흘러나오던 ‘볼레로’와 대비되며 부활의 숭고함을 가중시킨다. 

이후 약속된 새해를 얼마 남기지 않고 묵직한 한 방으로 악성 디지몬을 모두 날려버리는 모습은, 새해를 막 넘기기 전에 지난 과오를 씻어 내리는 일종의 통쾌함을 준다. 이제 막 새천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끊임없이 불어나는 구시대의 고민을 한 번에 씻어 내리는 그 모습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홀로 남은 악성 디지몬의 시계를 박살 낼 때에는, 마치 카운트 다운을 끝내고 세계가 멈춘 것만 같은 순간이 된다.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유지되는 일상은 덤이다.

<우리들의 워게임>에서 두 음악이 기억되는 건 이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의 양면을 보고, 그것을 뒤집는 것에서 우리의 과거와 이별하는 것이다. 

<어른제국의 역습>은 여러모로 특이한 작품인데, 작품의 주제의식이 주 연령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들의 워게임>도 그러했지만, 짱구의 주 시청 연령대가 디지몬 시리즈의 시청 연령대보다 훨씬 낮다. 그러나 두 작품은 모두 비슷한 주제의식을 말한다. ‘과거를 떠나 보내고 현재를 맞이하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주제는 작품을 무겁게 하기 십상인데, <우리들의 워게임>과는 달리 짱구 특유의 작품 세계가 무게를 덜어내어 보기 편하다. 오히려 주 시청 연령대가 어린 것이 작품적으로 이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게가 가볍다고 해서 작품이 전달하는 의미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어른 제국의 역습>의 부피는 가볍고, 무게가 제법 되기에 어떻게 보면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어른 제국의 역습>을 ‘히로시의 회상’이라는 음악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른 제국의 역습>은 도입부에서 박람회에 놀러 간 짱구 가족을 보여준다. 가장 잘나가던 시기의 집합체인 박람회를 보며 관객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것이 20대의 청춘일 수도 있고, 40대의 대박 난 사업을 이끌던 시절일 수도 있다. 그렇게 관객은 그 시절을 품에 안고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는 악당들이 나타나 작중의 어른들을 과거로 현혹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아이들이 홀로 남아 혼란에 빠진다. 짱구라는 작품의 특성상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가는 경우가 많은데, 도입부의 박람회 장면에서 부모들이 과거로 빨려 들어가듯 작품 속의 어른들도 악당들이 재현한 과거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동시에 극장에 앉아있는 아이들도 옆자리의 부모와 분리된다. 아이들의 시선으로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고,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작품이 아련하게 보이게 된다.

이 분리가 <어른 제국의 역습>을 특별하게 만든다. 구시대와 새시대의 간극에 놓인 2001년의 <어른 제국의 역습>은 어른과 아이를 구시대와 새시대로 갈라놓는다. 작품 속에서처럼 구시대를 대표하는 어른들은 계속해서 구시대에 남아있으려 하고, 신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들은 구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닮아있어 어른이 아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과거를 잊어선 혼란스러운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지난 광주를 후회하며 그렇게 외치지 않는가. ‘돌아가고 싶다.’라고. 

이렇게 영화는 스트레오 사운드처럼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이 갈림길이 합쳐지는 지점이 ‘히로시의 회상’이다. ‘추억의 냄새’에 취해 과거로 돌아간 짱구 아빠(히로시)를 보며 자녀와 부모는 서로 이해하게 된다. 어린 자녀는 ‘히로시의 회상’을 보며 어른도 어른이 아니던 때가 있었음을 알게 되고, 부모들은 박람회 장면에서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찬란한 시절’이 단 한장면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전부였음을 깨닫는다. 작품에서 악당이 줄곧 말하던 20세기의 향수(香水)가 그리움의 향수(鄕愁)가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우리가 새천년에 대해 돌아보는 순간이 된다. 노을은 20세기를 떠올리게 한다며 항상 저녁에 머물러 있는 20세기 마을, 그리고 외부로 나오면 맑은 하늘이 펼쳐진 악당들의 타워가 있고, 악당을 물리치고 밖으로 나오면 다시 노을진 저녁이다. 다만, 20세기가 아닌 21세기의 노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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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는 숲속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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