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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참치 Apr 25. 2019

현재에 대한 고민은 늘 과거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

<어벤져스 : 엔드 게임>(2019) 


이 글에는 본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웅의 탄생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아마도 마블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알맞은 키워드란, 다름 아닌 영웅 신화일 것이다. 건국 이래로 짧은 역사를 지녀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결핍과 공허감에 시달리는 미국에게, 서부극의 존 웨인이나 스타워즈의 제다이들이 일종의 ‘살아있는 신화’로서 기능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때 그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사실이 바로 ‘무근본성’이다. 말 그대로 그들에게는 근본이 없다. 어느 서부극에서도 총잡이들은 어딘가로부터 흘러들어와 다시금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이를테면 고전 서부극인 <수색자>에서 이든 에드워즈(존 웨인)가 바로 그러하다. 서부극의 스페이스 오페라 버전에 해당하는 <스타워즈> 시리즈는 두말할 것도 없다. 온 우주에 있는 제다이들은 영화 속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한다. 바로 요다가 그러하다.


이것은 마치, 자궁 없이 태어난 아이처럼 자신의 근원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는 자신의 강한 모습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은 슈퍼맨과 같은 강한 초인에게도 자신의 고향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게 했다. <맨 오브 스틸>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슈퍼맨의 고민은 단순히 힘을 어떻게 사용하고 누구를 지킬지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에도 던져진다. 따라서 우리는, 슈퍼맨 코믹스의 원작이 대공황 당시에 탄생했다는 점을 알지 못했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미국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잘 알게 된다. 현재에 대한 고민은 늘 과거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현재에 대한 고민은 늘 과거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간 실존에 관한 제1의 원리이자, 시간 여행을 주제 삼은 여러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교훈이기도 하다. 구태여 따져보면 과학적으로 신체 시간을 멈추어서 냉동인간의 형태로 미래로 향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빛을 쫓는 시간의 속도보다 더 빨라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우리의 시간 여행은, 한없이 무(無)에 가까워질지언정 그 이상을 탐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미디어에서의 시간 여행이 주로 과거로 편중되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을 듯하다. 미래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곳이다. 반면에 과거는 그들이 우리를 현재로 던져버린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미래에 기투하던 우리는 과거로부터는 피투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무근본성이 자리한 장소가 바로 그러한 과거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과거가 우리를 현재로 던져버렸고, 즉 우리는 과거로부터 피투되었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 또한 명확하다. 스스로를 국제 사회의 질서를 추구하는 영웅으로 여기는 그들의 모습이 현대의 영웅 신화를 만들어냈다면, 그 영웅들이 힘이 아닌 실존으로 고개를 돌리는 최근의 경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쩌면 영웅을 품었던 것은 특정한 자궁이 아니라 시대라는 이름의 모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유하자면 영웅의 탄생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탄생에 관한 목격담은 얽히고설키어 실체를 알아볼 수 없으니, 직접 과거로 흘러가 현장을 포착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셈이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영웅들은 우리이자 우리네 현실


10년을 달려온 마블의 영웅 신화가 안착한 지점 또한 과거로의 여행이다. 팬서비스로 보면 오마주에 가깝고, 한 편의 영화로 보면 그동안에 있었던 마블이라는 이름의 소우주를 횡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그들의 작전이 성공했던 건 단순히 개인이 개인의 역할을 온전히 잘 수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는 영웅에 가려진 영웅들이 과거의 어느 지점에서 줄곧 발견된다.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의 상관이자 연인인 페기 카터(헤일리 앳웰)도 그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이전에 소서러 슈프림으로 활약했던 에이션트 원(틸다 스윈튼)도 있다. 이때 에이션트 원이 자신을 찾아온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에게 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자신(과 타임스톤)이 이곳에 없으면 이곳 세계가 위험하다며 (처음에는) 타임스톤을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닥터 스트레인지>를 통해 마블 영화가 말해왔던 멀티버스(평행세계)가 여러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자리라는 게 단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세상 전체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 ‘앤드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혈투는 단지 그들의 세계 안에서 그들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고, 영화의 카메라 밖에 존재하는 여러 차원과, 더 나아가서는 스크린 밖에 있는 우리의 세계 또한 하나의 멀티버스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영웅들은 우리이자 우리네 현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러 영웅 신화를 떠올리고 있다. 마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까지, 또는 제임스 본드나 <신과 함께>의 김자홍(차태현)까지. 이들의 모습이 각기 다를지는 몰라도 개인의 자리에서만큼은 영웅임이 확실하다. 요컨대 마블이 말하는 멀티버스라는 개념이 평행우주라는 점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여러 영화 자체가 하나의 멀티버스로서 작용한다는 가정하에서, 그러한 영화라는 타이틀 하나가 담론으로의 인격을 띠고 영웅 그 자체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서부극에서 시작되어 마블에 다다르는 영웅 신화 혹은 영웅 영화의 계보를 세워보기보다는, 그것들 모두가 각자의 시대와 자리에서 개인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서부극과 그에 파생된 영웅 영화의 계보를 이 글에서 세세하게 나열해보지는 않을 예정이다. 위에서 말한 이유가 가장 크고, 두 번째로는 범주가 너무 넓어 모호함이 있을뿐더러, 세 번째로는 이 글이 영웅 영화가 아닌 마블 영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한 논의를 미루어 둔다면, 적어도 위의 맥락에서 우리가 영웅이라는 단어를 붙여볼 가장 알맞은 자리는 영화의 오프닝 장면일 것 같다. 영화의 서두에 호크아이(제레미 레너)가 가족을 잃고 허망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언급되는데,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 중에 오직 호크아이만이 (보통 의미에서의)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그 가족이라는 단어에 어벤져스라는 영웅 공동체를 포함시키는 게 영화 전체의 줄거리라는 점을 생각하고, 가족이라는 것이 어느 특출난 하나가 아니라 모두의 힘으로 밀고 당겨지면서 안정을 찾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영화는 그런 영웅들에게 가족을 이루는 법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에서 다시금 이 글의 가장 첫 문단으로 돌아가서, 바로 그것이 마블이라는 영화가 영웅들의 공허감을 채워주는 방법, 혹은 그것을 채울 수 있노라고 제시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과거는 우리를 현재로 던져버린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가정을 해보자. 훗날 시간이 흐르고 이 영화를 과거의 유물로서 돌아볼 우리가 떠올릴 생각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그 무엇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되돌아봄으로써 (흔히 말하는 정주행) 얻는 효과는 각각의 영웅들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부터의 진행일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함은 다음의 설명을 참조하라. 마블 영화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세계관에 여러 영웅을 차례로 투입하는 장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각의 영웅들이 탄생하게 된 원인, 즉 탄생의 기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어벤져스>라는 대전투에 끼워 넣기가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우리는, 그들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으므로 딱히 반복해서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 마블 영화들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그들의 기원이 아니라 그 반대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 된다는 것, 그 영웅들이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시대상을 반영하며 성장해온 마블의 영화들을 차례로 돌아보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대상들이 일종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자명하다. 2008년의 <아이언맨>에서 이라크전과 그 배경을, 2018년의 <블랙 팬서>를 보면서 1960년대의 흑인 운동이나 현대 미국의 (여전한) 인종차별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러한 시대상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알아두면 영화를 보며 세상을 들여다보기에는 편리할지도 모른다. 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문제의 기원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던져져 와 이곳에 뭉쳐지는, 현재라는 이름의 가족이다. 위의 문장을 다시 반복하자면, 미래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곳이다. 반면에 과거는 그들이 우리를 현재로 던져버린다. 즉, <엔드 게임>의 시간 여행에서 과거로의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바로 그것이다.


과거가 우리를 현재로 던진다는 말은, 다르게 말해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에도 통용될 만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른바 세월을 관통하는 담론,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도덕, 후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는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가 해당할 테다. 이를테면, 나는 마블 영화가 지난 10년 동안 반영해온 시간 중에 <블랙 팬서>의 흑인 인권이나 <캡틴 마블>에서의 여성 인권을 이 대목에서 떠올리고 있다. 그것들이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서 등장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타당한 시각이지만, 나는 이것들을 훗날 되돌아볼 때 우리가 어떤 현재를 사는 중일지가 정말로 궁금하다. 해결되었든 해결되지 않았든 간에,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평행세계로서 현재라는 이름의 미래로 우리를 기투시키고 있을 테니 말이다.


요컨대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시간 여행을 목격이 아닌 체험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영화가 첨언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백 투 더 퓨쳐> 같은 시간 여행은 다 거짓말이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해서 바뀐 현실이 분기점으로 갈라져 나오는 것일 뿐, 원래 있던 우리의 현실은 변하지 않아.” 이 대사가 영화 내에서 직시하는 부분은 그들의 미래는 바뀔 수가 없고, 앞으로도 바뀔 일이 없으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관측된 지금 이 순간으로서의 현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재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며 하나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 바로 평행우주라는 이름의 멀티버스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는 현재를 끝없이 연장해 무(無)에 가깝게 만듦으로써 겹친 세계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해답을 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때 그건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수천만분의 일의 확률일 테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웅이라는 세계가 아니라 영웅이라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세계 안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웅이라는 세계가 아니라 영웅이라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타노스(조시 브롤린), 우리가 각자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타노스라는 캐릭터가 영웅들 앞에 주어진 공공의 적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있다. 이들이 <시빌 워>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가히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이 갖는 내부적인 갈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의를 위해 히어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게 캡틴의 주장이었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히어로 개인의 자유는 억압될 수도 있다는 게 아이언 맨의 주장이었다. 마블 영화는 이러한 논쟁을 확대해서, ‘어벤져스’라는 미국을 은유한 집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노스라는 전 우주적인 재앙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반절이 죽어야 한다는 타노스의 논리는, 대의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시빌 워> 논쟁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마블 영화가 말하는 동시대의 모습이란, 우리의 문제가 타인을 통해 비추어질 때 그에 대한 논의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타노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통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를 깨닫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이때 특기할 점은 개인으로 활동하던 영웅이 하나로 뭉쳤다는 것도 아니고, 시간 여행을 통해 실수를 바로잡는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마블의 10주년을 끝내는 이 영화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함은 위에서 말했던 평행우주 단락으로 다시금 거슬러 오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부가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인피티니 사가의 마지막에 도달한 이 영화가 거쳐온 스물 몇 편의 영화들이 하나의 정지된 현재로서 작용한다는 점이 매체론의 관점에서 그러하다면, 덩달아 거기에 딸려온 시간들은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여전히 변하지 않은 곳으로 남아있는 현재의 어느 지점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말해서 <엔드 게임>의 시간 여행은 결코 시간 여행이 아니요, 오히려 그 여행길에 오르는 건 영화 밖의 우리이다. 조금은 낭만적으로 표현해보면,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때의 우리에겐, 그 때의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얻는 교훈들을 통해 어느 순간 훌쩍 성장한다는 점에 반론의 여지는 없다. 다만, 그런 디딤돌 자체를 없던 일로 치부하려고 떠나는 역사 수정 여행이 나에게는 달갑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런 것들을 인정하면서, 그런 시간들이 개인의 우주로서 줄곧 이어지고 나아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요즘의 영웅에게 힘보다는 과거로의 여행이 더 의미가 있는 이유이다. 자궁 없이 태어난 아이들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문제, 자신을 있게 한 시대상이 이미 과거의 유물로 변해버린 영웅들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슈퍼맨이 대공황 당시에 태어났다는 것도, 블랙 팬서가 1960년대 흑인 운동 시기에 탄생했다는 것도, 아이언 맨이 베트남전 당시에 태어났다는 것도 지금은 모두 잊혀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현재에도 여전한 영웅이다.





영화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평행으로서의 서부, 마블이라는 시대의 마지막 매듭


그래서 나는 아이언 맨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그는 탄생과 죽음이 명확하게 고지된 (내가 아는 선에서는) 최초의 히어로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잊고 사는 영웅들에게 있어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다시금 시간 여행을 떠나면서 솔선수범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성격상으로 미국의 독단적인 무력 혹은 재력, 그리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것들을 모두 감당하려 했던,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을 반영하는 게 그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런 시대의 종말을 지금 목격한 셈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마지막 손짓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순간, <라스트 미션>을 떠올린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기막힌 공통점을 짚어보도록 하라. 예전에는 옳았어도 현재에는 마냥 옳다고만은 볼 수 없는, 아니 어쩌면 틀렸다고도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면서, 결국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려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라. 그런 과거가 현재에는 옳지 않게 되었더라도 오히려 나는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가 있었다는 점을, 또한 그들이 살아있는 현재가 또 하나의 우주로서, 현실로 남아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회한이나 반성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게 정론이었다고 (타노스처럼) 필연성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시대로 보면 우리가 그곳에 있었고, 할리우드로는 또 하나의 서부가 이곳에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요컨대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연속, 혹은 나란한 평행으로서의 서부, 마블이라는 시대의 마지막 매듭이다. 서부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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