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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보는 영화
by 숲속의참치 Sep 29. 2017

음악으로 보는 영화 - 베이비 드라이버.

음악이 현실이 된다, 현실은 음악이다.

음악이 영화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여러 예술이 집합된 것이고, 그중에서 특정한 것이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사실주의 영화처럼 ‘사실성’이나 미쟝센 영화처럼 ‘미쟝센’이 전부라면 관객에게 있어 심심한 영화일 것이다. 사실성과 미쟝센은 아는 만큼 보이기에, 관심이 있어야만 가깝게 느껴지기에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음악은 다르다.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타 예술과는 달리, 음악은 자신의 ‘존재’감을 여김 없이 뽐낸다. 덕분에 우리는 팝송의 가사를 몰라도 귀로 듣고 즐긴다. 학력이나 인종, 부나 명예와 상관없이 특정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다. <베이비 드라이버, 2017>는 이러한 점에서 출발한다. 

음악을 이용하는 타 영화들과는 달리, <베이비 드라이버>의 시나리오는 미리 정해놓은 음악 순서에 맞추어 기획되었으며 세부적인 내용 또한 가사를 얼추 따라간다. 인물들의 걸음걸이부터 탄피가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흥겨운 리듬이 함께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이 있을 리가 없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흥겹다. 본작은 누가 보아도 흥겹고,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상업영화의 어필이라고 보기보단, 복지처럼 문화에 소외된 계층에게도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 내내 음악을 듣는 ‘베이비’의 캐릭터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신나는 음악을 틀고 춤을 춰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길을 걸어가며 심심한 세상에 음악을 가득 흘려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음악을 좋은 일이 생겼을 때만 들었을까? 우리는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음악을 듣는다. 이별 후에, 사별 후에, 직장에서 스트레스 등. 노래 가사에 위로 받고 삶을 동일시 한다. 즉, 본작의 음악에서 파생된 접근성은 관객들의 삶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생의 단 부분과 쓴 부분을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본작이 영화로 느껴지는 것은 이 부분이다. 우리가 살면서 ‘베이비’처럼 내내 음악을 듣지는 않기 때문이다. 음악을 미친 듯이 듣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본작에서 ‘베이비’가 듣는 음악이 영화 내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어폰은 나의 세상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기 위한 도구인데, 우리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달리 극장에서는 음악이 개인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다. 그로인해 우리는 스크린 위의 영상으로 ‘베이비’가 듣는 음악이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고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속 ‘베이비’의 경험이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다. 보통 영화 내에서 표현되는 (디제시스) 음악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주인공의 경험으로 생각하지, 자신의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이비’의 시점을 따라 진행되는 영화는, 주인공의 경험인 ‘음악’을 우리의 경험으로 전이한다. 

그렇다면 왜 음악이 주인공의 삶이 될까. 일단 음악을 듣는 이유부터 알아보자. ‘베이비’는 어렸을 적 사고를 당해 이명이 생기고, 이명을 음악으로 감춘다. 신체적 장애와 마음의 장애, 눈앞에서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트라우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관객이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부족하다. 이것은 영화 내적으로 인물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관객에게 공감대가 생기는 부분은 ‘베이비’의 범죄 장면이다. ‘베이비’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순간조차 음악을 듣는다. 그렇다면 어렸을 적에 왜 하필 자동차를 훔쳤을까? 그 덕분에 지금껏 좋지 않은 범죄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말이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해결될 수 없는 현실에서 귀인한다. ‘베이비’의 현실 문제는 부모님을 잃은 슬픔도, 귓가에 울리는 이명도 아니다. 돈이 없는 현실이다. 의지할 곳 없고, 자신의 힘도 없다. 그 과정에서 어딘가로 달려나가는 자동차는 현실의 해방구다. 옴짝달싹 못하는 교통체증과 같은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방과도 같은 행위는 불법이다. 실력과는 별개로 면허도 없는 나이에 운전하는 것과, 자동차를 훔치는 행위는 불법이다. 더구나, 우연히 훔친 자동차가 암흑세계의 인물의 것이라 붙들리고 만다. 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삶은 더 나빠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도 사실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닮아서일 뿐이다. ‘베이비’는 갑갑한 현실과 상처받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관객은 영화의 본질을 보게 된다. ‘베이비’가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커피를 사러 가는 장면은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를 떠오르게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베이비 드라이버>와는 정반대의 영화지만, 그 순간만큼은 두 주인공이 겹쳐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은 유서가 되어버린 항고서에 이렇게 적는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마일스’라는 이름을 숨기고 ‘베이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명을 사용하는 ‘마일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대리나 차장과 같은 직급이나, 손님으로서의 ‘님’으로 불릴 뿐이다. 내 이름 자체를 온전히 알아주는 건 가족이나 친구밖에 없다. 

때때로 그들조차 나를 알아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입을 닫게 된다. 영화 내내 과묵한 ‘마일스’의 모습은 소통이 단절된 채 고독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마일스’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마일스’가 진솔하게 대화를 하는 상대는 오직 양아버지와 여자’친구’ 뿐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마일스’가 항상 음악을 듣는 이유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준다는 점이다. 관객은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음악을 통해 두 사람 이외에 ‘마일스’를 추가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된다. 그 이유가 음악에 따라 진행되는 영화가 흥겨워서이든, 혹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해 세상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기 위함을 이해해서이든 간에 말이다.

다시 한번 위의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청각은 의식해서 보려고 하는 시각과는 다르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여진다. 눈을 감아도 귀는 열려 있고, ‘마일스’에게는 이명이 피할 수 없는 현실문제다. 부모가 죽은 것도, 현실이 궁핍한 것도 이명처럼 어쩔 수 없다. 마일스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1>은 <베이비 드라이버>처럼 신이 나지는 않다. 그러나 작품 속의 주인공 ‘유이치’도 사회로부터 고립된 상태다.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는 점점 지워진다. 그저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며 아픈 현실을 견뎌낸다. ‘마일스’와 ‘유이치’에게는 음악만이 자신을 구원해줄 유일한 것이다. 두 사람은 말이 없고, 또 고독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는 ‘에테르’라는 개념이 있다. 영화 중간마다 삽입되는 문자 이미지로 거론된다. 에테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으로, 세계를 이루는 4 원소에 천체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이 창안한 개념이다. 후에 빛의 매개물질로 제시되다 금세 반박되어 버리기도 한다. 본작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사용한다.

빛과 소리, 둘 다 우리의 주변을 채우는 것들이다. 방에 불을 켜면 바로 밝아지고, 음악을 틀면 소리가 들려온다. 빛과 소리는 우리 주변에 항상 있기에 인지하려 들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한다. 이 빛과 소리는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음악이 ‘마일스’의 세계를 감싸는 치유 매개체였다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더 나아가서 ‘릴리 슈슈’라는 음악을 ‘유이치’의 세계를 이루는 물질로 정의한다. 두 개념은 사실상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에테르에는 ‘마일스’의 음악에는 없는 속뜻이 하나 더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테르는 고대 우주 세계관에서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에테르는 천동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인류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신체를 작은 우주로 생각했다. 천동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개인의 신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관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고립감을 만들기도 한다. 한 행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은 계속해서 공전만 할 뿐, 그 대상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한다. 알 수 있는 건 그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두 인물이 10대인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던 10대에는 ‘나’는 나로서 가족의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나오면 더는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일하기 싫어도 일해야만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만 한다. 성인에겐 책임과 의무가 부과된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은 그 의무가 제 몸보다 무겁기에 동정할 수밖에 없다. 두 영화의 두 아이가 그렇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를 낼 법도 한데 두 아이는 그저 속으로 울분을 받아낸다. 타인과의 관계, 친구이든 부모이든 간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들뿐이다. 주변을 도는 행성처럼 일정한 거리감이 있음을 안다. 그것은 좁혀지지도, 넓혀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괴로워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립된 상태와는 다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란 건 무척 대중적이다. 문화라는 건 항상 대중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듣는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 주변인물이 나온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는 같이 범죄를 저지르는 동료가 “나도 이 음악 알아.”라며 공감을 표하기도 하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는 ‘유이치’를 포함한 친구들이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을 좋아한다. 

같은 취향을 공유함에도 그들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에서는 친구지만 현실에서는 왕따 관계인 ‘유이치’, 끝내 동료에서 적으로 돌아서게 된 ‘버디’. 같은 꿈을 꾸지만 다른 방향을 향해가는 인물들은 처음부터 섞이지 못할 이질적인 관계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가올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음악을 세상과 자신을 차단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빛과 음악이 우리 주변에 있어도 결국 자신만큼은 뚜렷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두 영화의 주인공은 처한 현실이 비슷하지만, 대응하는 법이 다르다. 일단 처한 현실을 비교해보면, ‘마일스’에게 들려오는 이명과 ‘유이치’에게 들려오는 친구들의 폭언은 같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폭력 사건(교통사고, 왕따)으로부터 생겨난 불쾌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불쾌한 소리는 멀쩡한 세계에서 생겨난 잡음이다. 잡음은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공기 중을 떠돈다. 그들이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감정과 존재를 분리한다. 음악을 듣는 것은 그것의 일부다. 귀를 막음으로써 외부인의 접근을 막고, 불쾌한 소음조차 막을 수 있다. 

심리학은 인간을 결핍의 상태로 규정하는데,자크 라깡은 거울을 예시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생후 6 ~ 18개월까지의 아기들은 거울 속의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말하자면 ‘자아’가 없는 상태다. 이내 아기들은 거울 속의 누군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아를 얻는다. 그 이전까지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의 ‘상’은 자신의 다른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은 일치할 수가 없다. 이것이 결핍이다. 비록 어릴 적의 기억을 잊어 무의식에 내재한 결핍을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알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결핍의 발현이 바로 ‘욕망’이다. 

두 아이에게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 음악이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욕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자동차를 운전하며 지금 처한 현실로부터 질주해 달려나가고자 하는 ‘마일스’와,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위에 서서 바람에 고민을 날려보내는 ‘유이치’다. 그들은 현실문제로부터 탈피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것이 행성이 공전할 때 벗어나지 않게 하는 관성이다.

음악은 두 아이 마음에 내재한 결핍을 속으로 억누르고, 울분과 분노를 리듬으로 승화시킨다. 음악은 두 아이의 중력과 같다. 갑갑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해주는 힘이다. 두 영화에서 음악은 영화를 지배하고, 우리의 현실 문제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누구나 가진 내면의 결핍을 보이지 않게 치유한다. 아프지 않은 주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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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는 숲속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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