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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당 영화당
by 숲속의참치 Jan 31. 2018

상상이 과하면 망상. 그러나 우리에겐 망상이 필요해.

연상호 감독의 <염력>

이 글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영화 외적인 것이며, 2부는 영화 내적인 것을 다룬다. 둘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방하다. 어느 하나만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둘 다 보면 좋다.



영화 <염력>의 작품 포스터ⓒ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1부 : 한국 영화 비판, <염력>

연상호 감독의 <염력>(2018)은 한 남자가 염력을 얻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힘을 얻고 어수룩하게 행동하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전반부와, 제자리 잡은 힘으로 약자를 대변하는 후반부다. 전반부는 코미디이나 후반부는 사뭇 진지하다. 그것도 그냥 진지한 게 아니다. 이 영화에는 2009년의 용산 참사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있다. 어느 정도 각색을 거쳤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보인다. 사실상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만 없을 뿐이다.

정권이 바뀐 뒤로 한국 영화도 바뀌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던 한국 영화계에 물꼬가 트였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택시 운전사>, <1987>, <군함도>, <청년경찰> 등. <염력>은 이 영화들 무리에 합류했다. 이 영화들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을 건드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못다 한 말을 하고, 의견을 피력한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의견끼리 충돌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에 국한해서이다.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들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한국 영화의 고질병으로 지적되는 '신파'가 여전하다. 그 신파라는 건 감정에 호소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비겁하다. 다시 말해,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이야기를 설계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모든 영화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위한 설계가 무척 엉성하다면, 메시지에 상관없이 완성도가 떨어진다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문제인 건, 문제의 고질적인 구조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우리가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이분법에 의존한다. 이 영화들엔 선한 개인과 악한 개인이 있다. 여기서 보통 선한 쪽은 우리고 악한 쪽은 그들이다. 그리고 그 이분법은 개인에서 단체로 확장된다. 이를테면 <택시 운전사>의 '운전사'는 광주 시민이 아닌, 대한민국 모두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쫓는 형사는, 당시 정권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메시지가 선명해질 수는 있으나, 단지 그것뿐이다. <택시 운전사>는 우리에게 광주에 대해 기억해달라 말하고 있을 뿐, 광주가 망가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지는 않는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여기까지는 한국 평론계에서 줄곧 지적되던 문제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문제점 하나를 추가하고자 한다. 이 영화들에는 '높으신 분'이 없다. 이 영화들은 모두 '소시민'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소시민이란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위아래의 이분법으로 구분 지어진다. 다시 말해, '운전사'를 쫓는 형사도 결국 소시민에 불과하다. 분명 좋은 놈도 나쁜 놈도 모두 소시민으로 설정해서 얻는 이득이 있긴 하다. 그들도 결국 위에서 시킨 일을 했을 뿐이고, 그걸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 혹은 우리는 소시민이기에 미시 세계에 살고, 이분법으로 구분된 악인도 미시 세계의 그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결국 거시 세계를 보지 못한다. 큰 그림은 없고 작은 그림만 있다.

영화의 주 관객층이 미시 세계에 살고 있으니, 그런 설정을 사용하는 듯하다. 상업 영화는 돈을 벌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아쉽기는 매한가지다. 원래 사회 변화가 아래로부터 위로 이루어지는 게 이상적이라고들 하지만, 분명 위에서 아래로의 변화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영화에는 그런 변화가 없다. <검사외전>에서 검사가 나쁜 놈을 때려잡는 게 위에서 아래로의 변화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 중산층이고, 고위직이기는 하나 명령받긴 매한가지다. 그리고 그 명령은 검사조직에 반하는 행위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다시 말해, 이 영화들에서는 '뭔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면 나쁜 놈이 된다.' 주인공들, 이른바 의인들은 자신을 방해하려는 단체나 사회에게 위협받는다. 그런데 그러면 꼭 주인공이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영화가 과거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가정해보자. 이때,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주인공을 재평가'하는 기분이 든다. 원래는 나쁜 놈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좋은 사람이다. 이 재평가는 역사를 바로잡는 게 아니라, 우리를 기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었는데 왜 재평가를 해야 하는가?

그 재평가는 당시 사회를 향한 것이며, 그것은 곧 그 사회를 격파해야 할 무언가로 본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맞는 말을 그대로 그려내면 영화가 무척 평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분법의 대비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전달 도구인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는 메시지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 전무하다. 우리는 발신지가 불분명한 메시지에 답신하려 하고 있다. 단지, 그 메시지가 잘못되었다며 수정 펜만 찍찍 긋고 있다. 그 메시지의 발신자는 누구인가?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문제를 만들어낸 쪽이 메시지의 발신자일 테지만, 발신자도 그 메시지를 수정해서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신자만 메시지를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피해의식이라는 말로 메시지의 본질 자체가 흐려질 수도 있다. 분명 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에 매달리는 게 이미 해결된 것을 다시금 헤집어 놓으려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택시 운전사>의 마지막에 운전사를 보내준 헌병이 단 하나에 불과했을까? 혹은, 왜 그 헌병이 특출난 것으로 보일까? 그건 그 헌병이 속한 집단이 주인공과 대립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당시의 군인집단을 광주 민주화 운동의 본질로 여기고 있다.

2부 : 한국 사회 비판, <염력>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일 것이다. 이 영화는 명백하게 컬트 영화다. 컬트 영화인 동시에, 히어로 영화이고, 코미디 영화이다. 그것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확실시된다. 한국형 히어로와 스파이더맨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이상,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영화 초반부터 눈치챘을 패러디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1편을 통째로 베껴놓은 듯하므로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힘을 얻은 주인공'이나, '힘을 엉뚱한 일에 사용하다 진짜 위기에 빠진다'라는 모티브가 비슷하다. 그 외에도 도심을 활공하는 장면이나 떨어지는 딸을 구하는 장면은, 아주 명백하게 오마쥬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히어로 영화는 아니다. 그냥 컬트 영화다. 이것은 위에서 한 말을 번복한 게 아니다. 연상호 감독은 원래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리고 그의 애니메이션은 '만화적 상상력'을 한껏 발휘했었다. 그 상상력은 신카이 마코토나 호소다 마모루의 것이 아니다. 연상호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상상적 매체를 통해 컬트적인 풍자물을 만들었었다. 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면, 돼지 저금통이 자신의 배를 가르는 주인에게 발악하는 장면이나 치킨집 주인이 '닭'인데 튀길 치킨이 없어 자기 아들을 튀겨서 배달해오는 장면이 몹시 충격적이다. 그리고 <부산행>은 열차에 좀비가 가득 찼는데 딸과 함께 부산 가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았던 우리는 <부산행>이 어느 정도 재밌는 이야기라 자부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한 줄 설명을 듣고 투자를 결정해야 했던 투자자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그야말로 컬트적이지 않은가? 컬트는 비주류다. 비주류에 성공을 예지하고 투자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염력>은 그보다 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염력이 생긴 사내가 철거 현장에서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의 영화적 정체성이 변함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애니메이션에서 실사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모종의 시너지가 나타났다. 원래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허구적 상상력'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 그런데 그 허구가 실사 영화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의 실사 영화는 모두 '증폭된 컬트'가 있다. <부산행>도 그랬지만 <염력>은 가히 최고의 컬트라고 말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그의 특징으로 거론되던 것 중, 컬트는 강해지고 비판은 약해졌다는 점이다. 이른바 미쳐버린 것으로 미쳐버린 것을 비판하는 게 컬트 영화의 특징인데, 연상호는 점점 어긋나고 있다. (살로소돔을 떠올려 보자) 쉽게 말해서, '대중 친화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투자를 받아 상업 영화를 만든 이상 어쩔 수 없지만, 기존의 연상호 팬들에겐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이러한 연상호의 기조는 그가 정신적 스승으로 꼽는 '콘 사토시'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콘 사토시도 애니메이션 감독이었고, 컬트적이었다. 다만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을 만들었었고, 연상호는 꿈과 현실을 극단적으로 부풀려 이질적으로 섞어 놓는 것에 능하다. 한쪽은 너무 현실적이고, 다른 한쪽은 너무 허구적이다. <염력>은 그 온도 차가 너무 확실해서 관객이 미지근한 어딘가에 놓이게 된다. 그건 확실히 영화가 극과 극의 평가를 받게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한 번쯤은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에서 튀어나온 돌연변이 같다. 수년 전, 김기영 감독 이래로 맥이 끊겼던 한국 컬트 영화의 맥을 잇기 충분하다. 애초에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일반적인 시각으로 비평하는 걸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농담이 아니다. 진지하게, 정말로 그렇다. 이 영화에서 악당은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며, 그 역할은 단지 인물의 화를 돋우는 것에만 충실하다. 그가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은, 어떤 인과 관계없이 곧바로 행동-결과로 이어진다. 또한 대놓고 영화의 주제 의식이라고 할 만한 대사를 읊조린다. 그동안 연상호가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앞서 말했듯, 연상호 감독은 <스파이더맨>의 각본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건 그 작품성을 베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웅물에 대한 반항이거나 반성처럼 보인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개연성이 없고 너무 유치하다는 둥의 평가는 잠시 접어두자. 이 영화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노골적이고, 친절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 이 순간 등장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 작품도 1부에서 언급한 한국 영화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나, 연상호는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만화, 혹은 괴물로 보아야 한다. 메시지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때려 부순다. <택시 운전사>에서처럼 우연한 기회에 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시민, <1987>에서처럼 목격자에서 피해자로 변하는 시민이 없다. 그들은 모두 어떤 권력 단체로부터 핍박받고 상처 입는데, <염력>에선 우연히 얻은 힘으로 모든 것을 때려 부순다.

유치하지 않다. 이것은 오컴의 면도날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과학계의 용어로, 가능하면 가장 단순하게 말하는 게 최고라는 뜻이다. A와 B로 나누어진 걸 A로만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최근 한국 영화들은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여러 복잡한 것들을 숨겨놓곤 했다. 굳이 없어도 될 만한 것들이다. 관객은 그런 이미지와 상징을 보며, 무언가 찾아내어 깨어있는 의식을 지닌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없어도 될 것이라면, 없어야 하는 게 맞다. 단지 관객에게 계몽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라면 불필요한 것이다. 사실 그건 관객을 기만하는 것이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에 '이미' 동조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 상징들이 없어도 다 알 법한 이야기다. 그 메시지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그 상징을 찾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무의미하다.

      

영화 <염력>의 한 장면ⓒ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어쩌면 이 영화에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경제용어로서의 의미를 제쳐두고, 이름 그대로 말이다. 속뜻을 포기하고 겉뜻만 읽어내려는 그 농담은, 영화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두들겨 패고 싶다는 것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사회에 느끼는 병폐를 곧이곧대로 표현해놓고, 아무런 이해관계나 개연성 없이 두들겨 패버리는 <염력>의 주인공은 우리의 <망상 대리인>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연상호가 존경하던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 이름이기도 하다. 상상이 과해지면 망상이 되지만, 모든 것이 미쳐버린 상황에선 그 망상이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염력>은 그런 영화다. 도피로서의 망상이 아니라, 해결책으로서의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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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는 숲속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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