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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Oct 16. 2016

별별 예찬, 오, 진주사 같은 기차역!

런던 여행 4 -공공건축예찬: 리버플 st. 기차역

각 나라에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는 게 있다. 설치 당시부터 흉물이라고 피켓 시위의 대상이었다가 전세 역전한 파리의 에펠탑도 있고 멋진 런던의 빅벤도 있고 수백년에 걸쳐 짓고 있어 더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리다 파밀리아도 있다. 여행의 매력이야말로 우리가 매체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가상을 실제로 접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커다란 이야기 줄기보단 곁가지나 소소한 에피소드 그리고 자잘한 모험담이나 지치게 만드는 갖가지 여행 일상마저도 대표적 건축물 투어보다 훨씬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경우가 많다. 내겐 바로 런던의 공공건축이 별의 별 예찬 대상이 되었던 1호 목록일 것이다.


취미로 시작하여 정식으로 한복을 배우고 만들기 시작하면서 색감과 문양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야말로 고된 바느질이 선사한 덤이었다. 독일어문학과 서양문화사를 전공한 내게는 마치 동양의 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부가적으로 생긴 것과 같았다. 늘 아쉬었던 부분이 바로 내 나라의 전통과 역사와 그림과 옷과 더불어 배우지 못했던 동양적인 것을 보는 안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 해 전부터 유럽의 성당, 교회, 박물관, 왕궁 말고도 긴 비행기 시간을 끝내고 마지막 종착지로 가기 위해 찾은 기차역의 색감과 형태에 나의 시선이 길게 머무르기 시작했다.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 역'은 지붕 위에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쏟아지는 햇살을 연한 노란색 색감으로 투과시키고 있었다.

     


기차역이나 공항 처럼 어디론가 출발하는 곳, 지친 몸을 추스리며 짐을 한 가득 끌고 도착하는 곳은 왠지 모른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그런지 기차역은 다양한 서사를 담고 있고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내 생애 최초로 마주한 유럽의 기차역은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학길에 올라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던 그 때, 13시간이나 되었던 긴 비행시간을 뒤로 하고 손톱깍기까지 알뜰히 챙겨넣은 무지하게 큰 유학용 여행가방을 끌어내리며 도착한 곳이 바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이었다. 그곳의 기차역은 높고 높은 둥근 아치형 천장이 보는 이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 시원하게 나를 맞이했었다. 크고 둥글고 단순한 형태의 시계도 좋았고, 그 둥근 천장에는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에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기차역 안에는 구수한 빵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맥심과는 다른 커피향과 버터를 듬뿍 바른 호밀빵 향기, 빗줄기 속에 꺼질 듯이 가라 앉은 듯한 그 습한 공기에 섞인 이 향기는 이후 여행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키곤 했다.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 st. 에 들어선 시간은 오전이었고 아름다운 기둥이 떠 받치고 있는 아치형의 높은 기차역 천정에서는 연미색 색감의 햇살이 가득 내리 쬐고있었다. 마치 한복감 중 '진주사'처럼 햇살이 마름모 형태의 지붕 무늬 사이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꼭 마름모꼴의 문양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그 문양 사이가 비어있어 햇살이 투과하는 그런 진주사 원단이었다. 연미색 진주사 느낌의 저 노란색 지붕과 그 위에 쌓인 거뭇거뭇한 먼지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는 것이 포근하고 얼마나 친근하고 무사하게 안착했다는 느낌을 주었는지 모른다. 세월이 쌓아 놓은 먼지와 오물마저도 아름다운 색감으로 남아 있다. 사진을 찍어보니 왼쪽 그물망 같은 곳은 '진주사'처럼 보이고 오른쪽 아래는 줄무늬 원단인 '항라'처럼 가로줄이 죽 죽 처져 있는 것이 오랫동안 쳐다보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모던하고 절제된 군청색과 회색의 색감으로 지극히 현대적으로 가꾸는 독일의 기차역과 달리 영국의 지하철은 오래된 좋았던 언젠가의 그 시절을 연상시킨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편 <스완네 쪽으로>처럼 기억 저 편에 간직하고 있던 가장 좋았던 시절의 느낌이랄까...저 오래된 철제 구조물은 마치 군더더기 하나 없이 죽 죽 잘 빠진 인간의 신체처럼 아름답기 까지 하다. 코린트식 오더 (지주를 떠 받치고 있는 기둥 아랫부분)에 아칸서스 잎 장식으로 보이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보이지만 정통 코린트 식은 아닌 듯하지만 전체적인 형식에서 그리스 로마 기둥 양식 중 가장 화려한 코린트 식 양식으로 보여서 그런지 기차역이 화려한 음악당 같아 보인다.           


천정 마감재를 투과하는 연미색 뿐만 아니라 진한 청색 기본 골격에 하얀색으로 칠한 아름다운 문양의 장식을 끼워 넣고 경계를 붉은색으로 칠한 점도 역사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저 색은 고상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과시하는 로열 블루 (#002366)인데 이 색의 철제 아치 곡선, 노랑 계열의 벽돌과 기둥의 색감, 디테일에 들어간 붉은 색까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왔다.


전체적인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주 기둥뿐만 아니라 기차역의 내부 건물에서 뻗어나가는 가지 같은 기둥 들도 전체적으로 같은 양식을 사용하여 통일감을 주고 있다. 기차역 안의 상점들도 규격과 색감 사용에서 엄격하게 로열 블루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공건축물에 대한 감시와 관리가 철저한 모양이다.



이곳, 다른 곳도 아닌 런던의 쇼디치에 이런 역사가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이 기차역은 더 가치있어 보였다. 이 근처야말로 아웃사이더의 요람이며 뱅크시를 비롯한 예술가 들 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이 몰려 있는 구역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행자들에게 영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각인시키는 방법으로 수 만 가지 슬로건 대신에 이렇게 건축물 하나면 사실 충분해 보인다. 아니 영국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간직해왔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가 충분히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에든버러로 가는 중에 기차 안에서 서둘러 찍어 본 Darlington 기차역의 스타일도 잉글랜드 지방의 공공역사 스타일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영국 전역에서 공공 역사에 대한 건축 지침이 엄격한 듯, 그래서 그런지 통일성이 있어서 그 부분에서 퍽이나 인상적이다.  Newcastle 지역이면 벌써 스코틀랜드 지역인데, 이곳의 기차역도 동일한 건축양식이다.


전체적으로, 영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비행기에서 창을 통해 내려 보았을 때 받은 인상을 땅 위에서도 재삼재사 각인시켰다. 16세기 산업혁명 이후 (근저에 깔린 잔혹한 노예무역까지 포함하여) 19세기 인류 최대의 발명이라는 하수구의 발명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근대의 발자취를 발길 닿는 곳마다 넘쳐나게 남긴 나라답게 조직하고 정렬하고 체계를 모범적으로 세워놓았다.

                             


일전에 덕수궁에 바람 쐬러 갔다가 석조전 지하 전시실에서 조선말 근대화 초기 시기에 대한 전시를 본 적이 있다. 배우지 못했던 한국의 근대 역사를 접하니 굴곡 없이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더라면 조선 황제국이 만들어내고 가꾸어 왔을 우리만의 기차역 양식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의 날개를 펴지 않을 수 없었다. 리버플 역을 보면서 우리 조상의 미적 감각과 그 멋진 문양들 그리고 절제된 가운데 독특하게 화려했던 그 스타일로 만들어 냈을 조선 황제국의 서울역이 어떤 스타일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오래된 미래를 창조해도 되지 않을 까 하는 소망과 함께! 



리버풀 역을 나오니 눈부시게 푸른 하늘색과 몽실몽실 구름이 보이고 붉은 박공벽의 오래된 건물과 최첨단 현대식 건물이 좌르르 펼쳐져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서 길거리 낙서를 보는 것이 오늘 나의 여정이다. 그런데 런던엔 비가 어울리는데 왜 이리 화창한 것인지 하늘만 바라보게 된다.


런던에서 저런 파란색 하늘이라니...


글. 그림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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