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이화동

느린 걸음으로 떠나는 혜화동, 종로 나들이

by ARIN

어릴 적 동네 골목길에서 고무줄놀이가 그리운 날이 있다. 솜사탕으로 얼굴에 수염도 만들고 소독차 뒤를 따라가다 길 잃어 울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어릴 적 조그마한 골목길이 어디 가면 있을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에 가면 그립던 어린 시절 향수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혜화역에 내려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다. 가로질러 이정표를 따라 걸어올라 가면 이화동 벽화마을이 나온다.

'미일 이발소' 이화동을 지키는 마지막 이발소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 오래된 이발소가

왼쪽 계단 밑으로 보였다. '미일 이발소'

빨강 파란색 뱅글뱅글 도는 것도, 간판의 글씨체도 어릴 때 동네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래! 이런 거야. 내가 그리던 것들...

이발소 외에도 '어린아이가 되는 곳', '40년 넘은 냉면집', '누룽지와 Coffee술국길'이란 곳 메뉴엔 2500원 국수, 1000원 설렁탕 등 절로 미소 지어지게 만드는 상점들이 많았다.

호기심에 기웃거리며 언덕을 계속 오르다 보면 하늘을 캔버스 삼아 세워진 멋진 조형물이 보였다.

'이화동 벽화마을'이라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하늘로 걸어 올라가는 신사와 강아지 조형물 사진이다.

옆으로는 같이 하트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 팔을 기울인 사람모형의 조형, 춤을 추고 있는 커플 조형 등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shall we dance?

조금 더 올라가면 낙원공원을 지나고 혜화동에서 종로까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거리가 나왔다. 예쁜 꽃,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카페 한 곳 한 곳마다 들어가서 구경하고 사진 찍고 싶었다.

더운 날씨인데 겨울에나 볼 수 있는 난로가 있는 그 굴뚝에 연기가 날 것 같았던 카페 '재즈스토리'. 그 안을 들여다보니 오래된 LP판이 가득 전시되어 있고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난 바로 옆에 'Cafe Travel'에 들어갔다.

카페 이름에서 여행자를 위한 휴식공간처럼 느껴졌다. 제일 끌린 이유는 전망이 너무 멋졌다.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며 주문한 카푸치노를 가져다주셨다.

사진기를 보시더니 "맑은 날 오시지... 힘들겠어요. 요즘 주말에도 관광객이 많지 않으니 날씨 좋을 때 또 놀러와요." 하셨다. 정말 이슬비가 날리듯 내려서 우산을 썼는데도 머리까지 다 젖었다.

그래도 깊은 커피맛도 확 트인 전망도 얼마나 좋던지 선택하길 잘했다.

Cafe Travel 전경

사장님 말처럼 주말 낮인데도 주민분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중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 몇 명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천사 벽화 앞에 관광객들

마을 주민들도 북적이던 관광객도 좁다란 골목에 놀았던 아이들이 사라진 동네.

혹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을 사람들을

홀려서 데리고 사라졌나?

그러고 보니 동네 간판이던 해바라기. 물고기 벽화도 계단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엔 빨간 글씨로 '주민들도 편히 쉬고 싶다' '재산권 보장' 이란 글이 쓰여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골목에서 울리는 소음도 힘들었을 테고 생활 하기도 불편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짠한 쓸쓸한 낙서였지만 조금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화동은 마을공동체의 정이 살아있고 도둑이 없고 토박이들이 모여 사는 1950년대 서울의 순수했던 모습을 간직한 마지막 마을이라고 했다.

그런 곳을 2006년 낙후지역 환경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담벼락 곳곳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적은 돈으로 저층 위의 도시재생사업이었다. 하지만 현재 지워진 벽화 대신 흉물스러운 낙서와 주인 없는 빈집들만 봐도 마을 주민들과 충분한 소통도 지속적인 개선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책 마련을 호소했으나 종로구와 서울시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서로 떠넘기기로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정부도 주민들도 결국 멀리서 벽화를 보겠다고 찾아온 관광객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처럼 보였다.

그런 속상한 마음도 잠시 장화에 심긴 푸릇 잎을, 담장의 해바라기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것만은 사라지지 않길...

마을 중심쯤 위치한 구멍가게. 할머니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고 있다. 나를 보고는 "머 사려고? 주인 없다. 필요한 거 있음 찾아봐라" 하신다. 가게 안은 정말 나 어릴 적 쫀득이, 반지 사탕 같은 게 있을 것처럼 옛 모습 그대로였다.

주인 할머니가 누웠을 자리도 아 정말 너무 정감이 갔다. 사람 많을 때 불편했어도 또 없으니 아쉽다는 할머니. 그렇게 한참을 할머니들 곁에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사드리고 일어섰다.

꼭 할머니 댁 놀러 왔다 가는 손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허벅지가 당겨서 아파왔다.

꾸불꾸불 계단과 언덕을 천천히 올라갔다.

빗물을 머금은 꽃들도 벽화도 너무나 싱그럽고 마을 박물관, 숨어있는 볼거리가 많아서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화동 벽화마을에는 대장간과 관련된 도구를 모아놓은 [대장간 박물관], 이화동 주민들에게 기증받은 사진자료, 생활도구, 추억이 담긴 영상물 등으로 이뤄진 [이화동 마을 박물관], 세계 각국의 자물쇠를 모아 놓은 [쇳대 박물관], 봉제 박물관인 [수작]등 마을 곳곳에 박물관들이 숨어있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은 전시관 휴일이라 안까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다음에 아이들과 손잡고 놀러 와야겠다.


계단을 오르며 지쳐갈 때쯤 하얀색 길고양이가 보였다. 하얀색 털을 가진 흰고양이. 셔터를 눌러도 놀라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아 가방을 뒤져봐도 줄 게 없네. 미안.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다 고양이가 자리를 뜨고서야 나도 일어섰다. 그때서야 성곽을 확인하고 정상까지 올라왔음을 알았다.

"와-멋지다" 확 트인 풍경. 시원한 바람.

비가 와서 더 분위기 있는 도시 풍경.

빗물에 온통 젖어도 맑은 하늘이 아니어도 생각보다 쓸쓸했던 이화동 골목이었어도 이곳에 올라와서 보니 좋았다. 그럼 됐다.

생각만 하고 그리워하는 것보다 이 곳에 있는 것으로 느끼며 확인하는 것으로 됐다.

한편에 쉬어 가란 듯 정자가 놓여있었다.

정상까지 올라온 관광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에 젖은 가방이며 옷을 말리고 있었다.

이화동 벽화마을을 걷고 찍고 먹으며 천천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2시간쯤 지나 있었다.

성곽이 보이는 끝자락엔 성곽 안쪽은 혜화동이, 성곽 바깥쪽은 창신동이 보인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도성 안은 동숭동이 도성 밖은 창신동이 있는 셈이다.

비가 와서 멀리 보이는 인왕산에 구름이 걸려있어 운치 있었다. 햇살 좋은 날에 오면 시원한 바람맞으며 정자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내려가면 좋았을 텐데...

올라왔던 이화동 벽화마을을 바라보았다.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고 정겨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인데 그 빨간 낙서가 맘에 걸렸다. 벽화도 사람도 상처 입지 않고 웃으며 맞이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넋 놓고 30분쯤 쉬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수건으로 정자 위를 닦으며 올라오셨다. 불편을 드릴까 싶어 얼른 일어섰다.

혜화동으로 올라왔으니 이제 동대문 방향으로 성곽따라 내려가 볼까.

성곽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골목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담장에 매달린 호박도 재미있다. 어느 집은 온통 화분에 심긴 나무와 꽃들 사이로 창과 지붕만 보였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노면이 울퉁불퉁한 데다 제법 가파른 골목길이었다. 이 곳이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소박한 풍경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70년대 이전 살아왔던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며 좋아하셨다. 이런 추억이 이야기가 되고 풍경이 되고 여행이 되는 것이겠지.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니 끝자락에 흥인지문도 저 멀리 두산타워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DDP도 보였다.

이화동 벽화마을과 성곽길은 낭만적으로 도심에서의 오랜만에 느껴보는 휴식이었다.

흥인지문에서 동대문시장 방면으로 걸어가면 시원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계천이 나온다.

한적하니 내려가 발이라도 담고 싶었지만 비가 와서 아쉬웠다.

청계천을 지나면 동대문시장, 평화시장이 나온다. 어느 상점에선 우리나라를 알리는 티셔츠를 팔고 있었는데 마음이 흐뭇해졌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외치게 된다.

시장 건너편으론 두타, 밀리오레 등 대형 쇼핑몰이 나온다. 청계천 다리만 건넜을 뿐인데 사람들로 북적북적 정신이 없다.

바로 건너편 우주선처럼 생긴 DDP이 눈에 확 들어온다. 늘 야경을 찍으러 밤에만 왔었는데 낮에 보니에서 더욱 거대하게 보였다.

다양한 구도로 사진 찍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DDP에선 사진도 찍고 전시회나 유적ㆍ유물도 볼 수 있고 복합 문화이다. 저녁이 되면 화려한 빛을 내는 우주선으로 바뀐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오후가 되면서 걷고 사진 찍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청계천을 따라 종로 5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너무나 유명한 먹거리가 풍부한 광장시장 나왔다. 그곳에서 순박한 기름진 녹두전에 막걸리. 매콤한 떡볶이 국물에 김밥을 찍어서 먹으면 허기졌던

배가 어느새 불러 더 먹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다.

소화도 시킬 겸 광장시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방이시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인테리어 소품까지 구경하면 하루를 꽉 채운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무나 흐뭇했다.

팍팍한 일상은 잠시 접어두고 느린 걸음으로 추억의 여행을 떠나보자.



기억에 남기다. 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