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
맑고 투명한 가을 햇살에 들판의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가을의 시간을 럭셔리하게 쓰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번 가을 여행지가 해남이다.
몇 년 전 봄에 만났던 해남이 무척 인상 깊었었다. 그때 이미 기회가 된다면 해남 땅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리라 마음먹었다.
산과 하천이 바다를 만나는 곳에 자리한 해남은 역사, 문화, 자연적으로 풍부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공룡유적지부터 시작해 신석기시대 유적인 조개무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대흥사와 미황사,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 바다, 조선시대의 우수영 등이 해남에 있다.
또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를 거쳐 초의선사, 현대의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 황지우, 윤금초, 이지엽 등의 여러 시인을 배출했다. 한국 시문학의 일번지가 해남이 아닌가 할 정도다.
자연환경으로 인해 해풍을 맞고 자란 농산물과 바다에서 나온 풍부한 수산물은 해남을 풍요의 땅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남도지방 중에서도 해안지방 특유의 맛과 인심이 깊게 밴 맛의 고장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해남에는 고천암 철새도래지를 비롯해 두륜산, 대둔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많다. 그중에서도 긴 암릉으로 솟은 달마산의 스카이 라인이 나에게는 가장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해남의 남단에 치우쳐 길게 솟아 있는 이 능선이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인 사자봉으로 이어진다. 흔히 말하는 ‘해남이 땅끝 마을’이라는 사실을 우리 눈으로 확인 가능한 곳이 달마산 능선이다.
이 달마산을 병풍 삼아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 미황사다.
신라 경덕왕 때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서역을 출발해 사자 포구에 도착했다. 의조화상과 그의 향도들은 검은 소의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서라벌로 향했다. 암릉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관에서 검은 소가 감동을 했는지 크게 한번 울은 후 앉아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 자리가 달마산 자락이었다. 의조화상의 제안에 따라 검은 소가 앉았던 자리에 절을 세운 후 이름을 미황사라 했다.
이 미황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달마산 주능선을 걷는 총 4개 코스 17.7km의 길이 달마고도다. 흙길 반, 돌길 반인 이 길은 기계의 힘이 아닌 순수한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조성한 길이다.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자연스럽게 나를 위로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좋은 길이다.
달마산 최고봉 인 달마봉 아래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지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서면 해남의 땅과 바다가 다 보인다. 달마고도 길에서 살짝 벗어나 이곳까지 오는 방법도 있고, 차를 이용해 산길까지 올라오는 방법도 있다. 도솔봉 주차장까지 차로 올라와 주차를 한 후 800m 정도 능선을 걸으면 도솔암에 도착한다.
도솔암에서 바라본 해남은 특히 아름답다. 가을 해 질 녘의 노을은 어린왕자가 의자를 42번이나 옮기며 하루에 42번 해 지는 모습을 보았던 슬프도록 아름다운 작은 행성의 노을보다 더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무 말하지 않은 채 노을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과 도솔암 능선에 서니 삶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 지는 풍경에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가을 여행만으로도 삶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솔암이다.